열대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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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모리미 토미히코의 소설이다. 한때 이 작가의 소설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당시는 한참 책들을 읽을 때라 사고, 읽고를 정말 열심히 했던 시절이다. 최근 떨어진 체력과 시간 부족과 노안 등의 문제로 이전처럼 책들을 읽지 못한다. 이런 저런 집안 행사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물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나의 게으름이다. 집에 콕 박혀 책을 읽으면 되지만 그냥 뒹굴거리는 시간이 늘어난다. 아이 핑계도 살짝 가능하다. 예전에 재밌다고 한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뚝딱 읽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 시간도 체력도 되지 않는다. 물론 얇은 책은 여전히 가능하지만 이 책처럼 두껍다면 불가능하다. 실제 이 책은 작가의 책 중에서 가장 두툼하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모리미 토미히코는 글을 재밌게 쓴다. 읽지 않고 고이 모셔둔 책들(당연히 여러 권이다) 외에 읽은 책들은 모두 만족했다. 재간되어 나온 책들을 보면서 읽었거나 사놓은 책이란 사실에 괜히 뿌듯해하지만 늘 그렇듯이 기약할 수 없다. 이 책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 재밌다는 첫 감탄을 내뱉었지만 두툼함에 다 읽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모티브로 가상의 소설 <열대>를 만들어내어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이야기의 힘과 재미에 빠져 상당히 허우적거렸다. 작가는 <아라비안 나이트>란 제목보다 <천일야화>란 제목을 더 선호한다. 그래서 등장인물 중 한 명도 천일이란 한자로 ‘지요’란 이름을 붙였다.


아주 오래 전 범우사 판 <아라비안 나이트> 10권을 모두 읽은 적이 있다. 이 책들 어딘가에 있을 텐데 찾지를 못하겠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내가 알고 있던 몇 가지 아랍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의아해했던 것은 기억난다. 그리고 천 일과 천 편을 혼동했던 것도 떠오른다. 실제 이야기가 전개된 날짜도 천 일 밤이 아닐 것이다. 이런 기억들은 사실 이 소설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천일야화가 품고 있는 이야기 방식들이 더 중요하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또 낳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야기의 향연들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통 읽는 <아라비안 나이트>가 후대의 편집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이야기의 문을 여는 것은 작가다. 모리미가 등장해 오래 전 읽었던 <열대>란 소설을 떠올린다. 재밌어 아껴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책이 사라졌다. 끝까지 읽지 못했는데 이 책의 기억이 지금 읽고 있는 <천일야화>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그러다 한 독서회에 참석해 한 참석자가 그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끝을 보고 싶어하는데 그녀가 말한다. 아무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다고.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그녀가 <열대>를 만나기 전과 후로 넘어간다. 그녀가 일하는 가게 손님을 통해 <열대>란 책의 내용을 복원하고자 하는 모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모여서 서로의 기억을 통해 책 내용의 일부를 건져낸다.


그녀의 이야기는 또 다른 사람의 편지로 넘어간다. 편지의 내용은 <열대>의 작가를 알고 있던 지요 씨를 찾아가 생긴 기묘한 이야기들이다. 이 여행을 통해 <열대>와 관련된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한다. 그 실체가 드러날까 하는 순간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번 이야기는 판타지 속 상황으로 흘러간다. <로빈슨 크루소>와 <해저 2만리>와 <신밧드의 모험> 등과 엮여 펼쳐진다. ‘창조의 마법’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파고들고, 이 판타지 속에서 <열대>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또 다른 단서가 나온다. 마왕의 정체는 너무나도 분명한데 기억을 상실한 인물의 정체는 추측만 가능하다. 여기서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솔직히 이 소설에서 내용을 요약하거나 그 이야기들의 실체를 분석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누구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는 <열대>처럼 개개인의 독자들은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기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왜곡하고, 저장한다. 다시 그 책을 읽었을 때 과연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 책인지 누가 자신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사실과 그 때 놓친 이야기들이 눈에 더 들어올 것이다. 읽었다는 사실과 가장 강렬한 기억은 남겠지만 말이다. 수수께끼의 소설 <열대>의 존재를 통해 <천일야화>와 이야기란 소재를 개인의 경험과 기억 등과 멋지게 연결했다. 읽으면서 다다미 넉 장 반이 나올 때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재밌고 멋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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