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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주 ㅣ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박해로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박해로의 공포소설은 언제나 한 공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한다. 바로 섭주다. 가상의 공간인 이곳에서 이전 세 이야기가 펼쳐졌다. 읽으면서 작가가 중간중간 풀어낸 작은 단서를 통해 이전 작품의 한 자락을 살필 수 있었지만 나의 저질 기억력은 그것들을 완전히 떠올리지 못했다. 아쉽다. 만약 이 소설의 제목이 <섭주>가 아니고, 섭주가 무대가 아니었다면 아쉬움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한 지역을 배경으로 연작소설을 쓰게 되면 그 공간이 현실처럼 다가오고, 그 지명이 하나의 공포로 각인된다. 최소한 현재 나에게 섭주는 그런 곳이다. 이 소설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바로 앞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표자가 섬뜩하다. 다섯 마리의 뱀이 다섯 색깔로 그려져 있다. 이 뱀들의 정체는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보면 볼수록 섬뜩하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이 뱀들의 악의 상징처럼 다룬다.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뱀에 대한 평가와 대우가 달라지는데 작가는 사악하고 나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 뱀들은 영성을 가지고 있지만 물리적 힘은 절대적이지 않다. 은밀하게 적은 적을 상대할 때는 이 힘이 대단하지만 그 실체를 알게 되면 물리적 타격이 가능하다. 우리가 흔히 고전 전설이나 민담에서 본 것처럼 무찌를 수 있는 존재다. 완전히 영적인 존재가 아니란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고, 뱀들을 아주 쉽게 부려 상대방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최영우가 우연히 상갓집 돈을 훔쳐 달아나 흉가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일어난다. 흉가에 간 이유는 출소 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흉가에서 거울과 방울을 발견한다. 그가 돈을 훔친 곳은 다흥이고, 경찰이 수사망을 쪼여오자 달아난 곳은 섭주다. 최영우가 이야기의 문을 열었다면 본격적인 이야기는 서경을 통해 일어난다. 서경은 노처녀 초등학교 교사다. 학교에서 별명이 B사감이다. 얼마 전 사귀었던 남자가 아버지와 정치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이 무산되었다. 둘만의 살림을 살 만도 한데 서경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쓸 힘이 없다. 학교에서는 거의 왕따다. 그러다 엄마 꿈을 꾼 후 제석정이란 곳에 간다. 이곳에서 방울과 거울을 줍는다. 이때 거대한 뱀이 나타난다. 이 뱀은 그곳에 살고 있는 굶주린 고양이들과 격렬한 싸움을 하고 결국 죽는다. 이 장면을 읽을 때 서늘했다.
이 제기를 가지고 온 이후 서경은 이상한 꿈을 꾼다. 몸에 열은 나는데 체온을 재면 정상이다. 무병이란 생각이 먼저 든다. 의정부에서 양어머니가 내려와 그녀와 잠시 머문다. 아픈 그녀 대신 학교에 전화를 하는데 선생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 전화로 드러난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갔을 때 모습은 또 어떠한가. 언어 폭력, 뒷담화, 갑질 등의 다양한 저질 행위들이 벌어진다. 위축된 삶을 산 그녀에게 최악의 환경이다. 결혼이 무산된 아픔과 이 억눌린 감정들 틈새로 어두운 기운이 침입한다. 그녀가 꾸는 꿈은 현실과 환상이 엮이고 꼬인 것이다. 그리고 이 힘을 그녀가 받아들이면서 성격이나 행동 등이 변한다. 이후 이 힘을 발현하는데 조금의 거침도 없다. ‘폭주’란 목차가 나올 정도다. 이제 뱀이 사방에서 꿈틀거리고 나타난다. 죽음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언제나처럼 가독성이 좋다. 한국 무속을 바탕으로 서서히 젖어드는 서늘함은 이번에도 유지된다. 중간에 사파왕와 우녀의 전설은 민담의 공포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설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는 박해로의 전작들에 나온 이야기들이 이 소설 속에서 자주 말해진다는 점이다. 언제 시간이 나면 하나씩 찾아보면 재밌을 것 같다. 소설 중간에 추락한 소설가 이야기가 나온다고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전작처럼 무녀들이 등장해 거대한 힘의 존재를 일깨워준다. 무녀와의 대결은 예상 외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작가가 보여주는 정통 무속신앙과 호러의 결합이 이번에는 더욱 부드럽게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살> 이후 최고다. 책 마지막을 덮으면서 아직도 ‘섭주’ 이야기가 끝날 때가 아니라고 느꼈다. 또 어떤 섭주 이야기로 돌아올지 다음 여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