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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평점 :
처음 작가 이름을 보았을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작품은 이선영 작가의 소설이 아니었다. 작가의 이력을 보고 기억을 조정했다. 집에 있는 소설이다. 언제나 나의 저질 기억력은 작품과 작가를 헷갈린다.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매칭이 이루어진다. 이 틀린 매칭이 맞다는 기억으로 출력되고, 사실 확인 전까지 공고해진다. 가끔 틀린 기억은 합리화란 이름으로 사실을 왜곡하려고 한다. 사실을 확인해도 시간은 이 사실을 잊는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나의 저질 기억력처럼 작동한다. 이 소설 속 학교 성폭력도 그 중 하나다. 가해자가 보여준 발언과 행동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경기도 가평 청우산에서 여자 변사체가 발견된다. 투신 자살로 보이지만 백규민 형사는 이질감을 느낀다. 신원을 확인하다 사망자가 오기현이라고 확인한다. 그녀의 언니 윤의현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마지막 확인 작업으로 의붓아버지 오창기를 데리고 온다. 그를 데리고 온 파출소 순경의 모습은 너무 공손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든 의문 하나 왜 지문 확인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시체의 부식 정도나 상처 때문에 지문을 확인할 수 없었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한국은 주민등록증을 발급할 때 모두 지문을 날인하고 그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데 말이다.
첫 장에서 백규민의 과거사가 간략하게 흘러나온다. 경찰대학 출신이라 출세가 보장되어 있는데 한 사건 때문에 좌천되어 가평으로 온 것이다. 아내와 이혼했고, 부모와도 좋지 않게 헤어졌다. 가슴 속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가 기현의 언니 윤의현을 봤을 때 끌린 것은 그녀 속에 깔린 어둠과 상처 때문이다. 그리고 자매라고 하는데 둘의 성이 다르다. 출생연도도 1년 차이가 난다. 의현을 낳고 재혼해 기현을 낳았다고 한다. 작가는 이렇게 자매의 과거사를 조금씩 쌓아 올리고, 기현의 죽음에 의문을 던진다. 실족사나 자살일까 아니면 타살일까? 부검을 해야만 이 사실이 명확해진다. 법적으로 부검을 하려면 부친 오창기의 동의가 필요하다.
오창기의 꽃새미 마을은 대지주의 권세 안에 자리잡고 있다. 파출소 경찰이 왜 그렇게 굽신거렸는지 알려주는 대목이 마을 앞 꽃가게들의 실제 주인이 누군지 알려줄 때 바로 나온다. 세상이 서울의 부정부패에 눈길을 줄 때 지방 토호들은 자신의 이익을 착실하게 챙긴다. 자신의 비리를 조력자들을 통해 덮는다. 오기현과 오창기의 사연은 그렇게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마을 여자들을 달뜨게 하는 남자 신명호가 등장한다. 시력을 잃었고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그다. 시선을 이 두 남자에게 가져간다. 누가 그녀를 죽였을까? 그런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 다른 가능성 하나가 떠올랐다. 책을 덮기 전 그 가능성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교묘한 트릭을 사용해 독자의 시선을 가렸다. 이 사실이 풀려나올 때 장면 하나 하나가 의미를 가진 채 다가왔다.
학내 성폭력과 성추행,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등을 소재로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을 엮었다. 대학 내 성폭력 문제를 학내에서 어떻게 처리하고 대처하는지 보여주는 장면과 가해자의 말과 행동은 역겹지만 사실적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려워하는 현실은 비정상적이지만 현실의 실제 모습이다. 오창기와 오기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론에 드러나는 사건들은 피해자의 상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이 피해자의 사연을 자신들의 이익에 이용하는 언론들이 얼마나 많은가. 탐사보도란 이름으로 공익을 위하는 척하지만 속내는 시청률이라는 점을 작가는 그대로 지적한다. 좋게 보면 공생이지만 결국 언론은 이 사실을 빨아먹으면서 기생한다. 공생이 되려면 지속적이거나 피해자의 상처가 아물어야 가능하다. 이 소설 속 이야기들은 상처를 봉합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진실의 무게가 주는 무거움을 감당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