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 폴리스 - 홍준성 장편소설
홍준성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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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작가다. 2015년 한경 청년신춘문예란 문학상에 당선되었다는 것 정도가 사전 정보의 전부였다. 제목만 보고 SF 판타지 작품인가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지만 낯선, 정보가 부족한 작가를 조금 꺼리는 편이다. 그러다 2021 런던북페어 화재의 한국소설이란 소개 포스팅을 봤다. 내가 이런 광고에 약한 편이다. ‘역사와 철학을 종횡무진하며 직조해낸 현대의 우화’란 소개는 괜히 지적 허영을 부채질한다. 어떤 식의 이야기가 나올까 호기심을 가졌다. 역사와 철학이란 단어는 더딘 책읽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불러왔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이야기는 모두 나의 예상을 뒤엎었다.


고아원 일련번호 42로 불리는 소년을 둘러싼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재편되는 그린다고 했지만 소설 속에서 특정한 주인공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목에서 폴리스가 나오기에 주인공이 경찰로 성장하거나 경찰일 것이란 나의 예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한 고서점의 책벌레와 그 책벌레를 먹는 박쥐와 서점에 쫓겨 달아난 박자를 잡아먹는 송골매와 그 송골매를 노리는 고양이로 이어지는 도입부는 ‘뭐지?’란 의문부호를 달기 딱 좋은 전개였다. 그리고 고양이와 송골매가 양패구사한다. 이것을 본 노숙자가 고양이는 버려지고, 송골매는 박제품으로, 아직 먹지 못한 박쥐는 약재상에게 판다. 박제상과 약제상은 모두 난장이고, 이 두 동물을 산 사람들로 이야기는 넘어간다.


소설의 무대는 비뫼시라는 가상의 공간이다. 약간 스팀펑크를 가미한 세계다. 왕이 권력을 쥐고 있는데 귀족과 부르주아지들이 그 힘을 키운다. 차도 텔레비전도 총도 있지만 빈민가의 분위기는 빅토리아 시기의 느낌이 난다. 이야기의 문을 연 두 동물 중 박쥐는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유리부인에게 팔린다. 박쥐를 먹으면 낫는다는 민간 요법 때문이다. 고약한 맛이지만 고통보다는 낫다. 그리고 그 남편은 댐 공사현장으로 출근한다. 아내는 병 때문에 저축한 돈을 모두 소진했고, 남편은 정부의 댐 공사 덕분에 생계를 이어간다. 공사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집안 형편이 조금은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예산 부족과 이 부족한 예산으로 몇 가지 안전 기준을 살짝 넘어가고, 예상하지 못한 큰비가 내리면서 댐이 무너진다. 모르고 보면 천재이지만 독자들은 이것이 인재란 사실을 안다. 그 비리의 정점에 비뫼시의 가시여왕이 있기 때문이다.


유리부인은 임신이 되지 않는다고 판정 받았었다. 그런데 신의 변덕인지 그동안 고아먹은 박쥐가 몸 속에서 변화를 불러왔는지 임신한다. 그 아이가 바로 고아 42다. 얼굴 생김새는 박쥐를 닮았다. 여기서 또 한 명의 임신부가 등장한다. 바로 가시여왕이다. 그녀도 아들을 낳는데 박쥐와 닮았다. 지능이 떨어지고, 인격형성에 문제가 있어 철가면을 씌운 채 지하에 가둔다. 이 이전에 가시여왕이 왕권을 잡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려주는 간략한 왕궁 암투사가 흘러나온다. 잔혹하고 참혹한 이야기지만 재미있다. 이 정도 필력으로 왕권 쟁취를 둘러싼 이야기로 장편 소설을 쓴다면 아주 멋진 소설이 나올 것 같다. 살짝 기대해본다.


사실 이 소설에서 줄거리를 요약하고,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42를 둘러싼 이야기가 또 다른 아동 학대로 이어지고, 댐이 무너진 순간 그 물길이 지나간 곳은 빈민가였다는 사실은 나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읽은 듯한 기시감을 불러왔다. 권력은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고, 책임을 전가한다. 당연히 그들은 죽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무너진 빈민가를 재건하고, 상하수도 공사를 제대로 이행해야 하지만 그런 비용이 시에는 없다. 있다고 해도 그런 곳에 쓸 마음이 없다. 이런 사실을 말해도 언론은 입을 다물고 전달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낯익은 장면들이라 어디에서 봤다고 특정하는 것이 힘들다. 작가는 이런 상황들을 이야기 곳곳에 풀어놓았다. 그것을 평가하고 비판하기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 이어지는 과정이 상당히 가독성이 좋고 잘 읽힌다. 특정한 주인공이 없다고 해도 순간순간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연과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시선을 잡아당긴다. 읽다 보면 상당히 많은 주석들이 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원전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변용한다. 원래 의미를 다르게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시간이 되는 사람들은 원전을 찾아 비교하는 재미를 누릴 수도 있다. 물론 적지 않은 책들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중간에 죽은 자들이 등장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가고일 조각상의 존재와 마지막 장면 등은 카르마란 제목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예상하지 못한 재미를 가져다주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열등의 계보>에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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