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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평점 :
하라 료의 신작이다. 전작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가 나온 지 14년만에 나왔다. 한국에서는 나온 것이 2018년 6월이니 2년 8개월이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나왔다. 이전에 한 번 썼는지 모르겠지만 미국 고전 하드보일드 소설이 나에게 맞지 않아 읽기를 중단했던 적이 있다. 워낙 유명해서 몇 권을 더 읽기는 했지만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최근에 나온 하드보일드의 경우 재밌게 읽은 소설들이 상당히 있다. 하지만 하라 료의 소설만큼은 아니다. 비채에서 <내가 죽인 소녀>가 나오기 전 다른 출판본으로 이 소설을 재밌게 읽었는데 그때만 해도 이 작가가 얼마나 유명한지 몰랐다. 그리고 하라 료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완전히 빠졌다. 그의 과작이 너무나도 아쉬운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미국 고전 하드보일드를 읽을 때 고역 중 하나는 문장이다. 다시 읽으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때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하라 료의 소설은 그 반대다. 너무 잘 읽힌다. 그리고 탐정 사와자키가 너무 매력적이다. 이번 소설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등의 미스터리 문학상 다수를 수상한 이력이 있는데 작가를 생각하면 당연하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한자리에 앉아서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책이다. 불행하게도 일이 많은 시즌이라 며칠의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 나의 저질 기억력이 이전 작품에도 등장한 감초같은 인물들의 이미지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그 재미를 온전하게 누리지 못했다. 언젠가 몇 권 되지 않는 하라 료 소설을 연속적으로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의 변천사를 느껴보는 재미를 한 번 정도 경험해 보고 싶다.
벌써 사와자키 탐정의 나이가 오십대다. 몇 권 출간되지 않았는데 이 나이라니 많이 아쉽다. 다른 작품들처럼 어느 날 중년의 신사 한 명이 그를 찾아온다. 밀레니엄 파이낸스 신주쿠 지점장 모치즈키 고이치라고 소개한다. 그는 한 요정의 여주인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다. 선수금 30만 엔을 지급하고 사라진다. 이전 작품처럼 이것은 그와 첫 대면이자 마지막 대면이다. 그리고 사와자키는 조사를 시작한다. 밀레니엄 파이낸스 신주쿠 지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2인조 은행 강도를 만난다. 뭐지? 생각하는 순간 사건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지점장이 나타나지 않아 금고에 있는 돈을 인출하지 못한다. 은행 강도 주동자는 사라지고 다른 한 명은 자수한다. 가이즈를 여기서 만난다.
가이오는 대학생 인력 공급회사 대표 중 한 명이다. 상당히 아이디어가 좋고, 수완도 좋다. 모치즈키 지점장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사와자키와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낯익은 두 형사가 등장한다. 니시고리와 다지마다. 이 형사에게 사와자키가 있는 것이 의외다. 돈을 훔쳐가지 못했지만 금고는 열어봐야 한다. 열린 금고 속에 엄청난 고액이 들어 있다. 은행의 돈은 분명히 아니다. 그런데 지점 영업마감까지 나타나지 않은 모치즈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음 날 명함에 나온 전화번호와 책상 위에 있는 가족사진을 단서 삼아 지점장의 집을 찾아낸다. 이곳에 다지마 형사와 들어간다. 다지마가 욕실에서 시체를 발견한다. 세 들어 산다고 들은 사람의 인상과 닮았다. 그는 누구고, 자살일까?. 타살일까? 아니면 사고사?
이 소설을 읽다 보면 파출소 경찰에 대한 아주 멋진 칭찬이 나온다. 사와자키가 의뢰인의 요청을 수행하기 전에 요정을 살짝 둘러보러 갔을 때 그를 수상하게 느끼고 파출소 경찰이 신원조회를 한 것이다. 동네 사람들과 밀착되어 있고, 사건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는 경찰도 파출소 경찰이다. 하지만 뛰어난 순발력과 사전 지식을 가진 사와자키에 속는다. 그리고 모치즈키가 의뢰한 여주인의 죽음 소식을 듣는다. 돈을 그냥 꿀꺽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그는 그런 탐정이 아니다. 조사를 더한다. 여기에 모치즈키 실종 사건 조사가 겹쳐진다. 가이즈와 만나는 횟수도 시간도 늘어난다. 혹시 사와자키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지 황당한 질문까지 한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잘 짜인 구성과 전개는 여전히 뛰어나고 재미있다. 읽다 보면 시간의 흐름과 변화 속에 바뀐 스마트 기기에 대한 사와자키의 부적응이 나오는데 약간 씁쓸하다. 은행 강도 사건에서 휴대전화가 없는 유일한 인물이란 대목이 나온다. 낯익은 야쿠자들이 등장해 과거의 기억을 더듬게 만들고, 이 사건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추리하게 한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사와자키의 애차인 블루버드가 사라진 것이다. 평생 그 차만 타고 다닐 것 같았는데. 차가 바뀐 사실이 나오기 전까지도 당연히 그가 탄 차는 블루버드라고 생각했다. 왠지 트릭에 당한 느낌이다. 그리고 하나의 의뢰가 사건으로 이어지고, 형사와 야쿠자와 꼬이고, 살짝 숨긴 비밀 하나가 엮이면서 미스터리 소설의 재미를 준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재미는 사와자키의 말과 행동이다. 그가 피운 담배 한 대, 까칠한 대사 한 마디, 투철한 직업의식 등이 매혹적이다. 다음 책이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다시금 하드보일드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