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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가, 나의 악마
조예 스테이지 지음, 이수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월
평점 :
띠지의 광고 문구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지옥 같은 데뷔작’, ‘<케빈에 대하여>, <나를 찾아줘>, <오멘>의 만남’이란 문구다. 이 문구들 중에서 나의 시선을 특히 끌었던 단어는 ‘지옥’ 과 ‘오멘’이었다. 예전에 대충 본 영화 <오멘>과 워낙 유명해서 읽었던 소설 <오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번역 제목에도 ‘악마’란 단어가 들어가기에 그대로 초현실적인 능력을 가진 악마가 등장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어떤 면에서는 <오멘>이나 <로즈메리의 아기>를 떠올렸다. 착각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예상과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소설은 엄마와 딸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한 명은 엄마 수제트. 다른 한 명은 딸인 해나다. 수제는 크론병으로 고생하다 현재의 남편 알렉스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예쁜 딸 해나를 낳았다. 평범한 딸이라면 육아의 힘겨움에 멈출 수 있지만 이 딸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일곱 살이 되었는데도 말을 하지 않는다. 선택적 함구증이라도 걸린 것일까? 말을 못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학교에 보내면 되지만 유치원 등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킨다. 속된 말로 잘린다. 엄마가 딸을 홈스쿨링 하는 데 진도를 잘 따라온다. 처음 봤을 때 수제트는 조금 특수한 아이 육아 지친 엄마 정도로 보였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것이 큰 착각임을 보여준다.
해나가 처음 말을 했을 때 나의 머릿속은 드디어 ‘악마’가 등장했다고 좋아했다. 악마가 어떤 능력을 보여줄까 기대했다. 그런데 이 등장은 연습한 연극이었다. 마녀처럼 자신을 꾸민 것이다. 해나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엄마에게서 아빠 알렉스를 독차지하기 위해서다. 육아에 지친 엄마가 보여주는 몇 가지 반응들에 비해 회사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해나를 사랑으로 보듬어준다. 육아에서 배제된 아빠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이다. 해나가 말을 못해도. 유치원 등에서 문제를 일으켜도 그는 현실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해나에게 아빠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이자 존재다. 모녀의 갈등은 여기서 시작한다.
수제트는 신화가 된 모성애에 짓눌린다. 말을 못하는 것 때문에 진단을 여러 곳에서 받는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늘 가까이에서 본 것 때문에 딸이 저지른 것임을 직감한다. 늘 붙어지내야 하는 그녀에게 쉴 틈이 없다. 독박육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엄마들의 고통을 그대로 투사해놓았다. 여기에 해나의 점점 심해지는 장난과 악의 가득한 행동은 도를 넘어선다. 다행이라면 아직 해나가 일곱 살 여자 아이란 사실이다. 그녀는 딸의 문제를 파악하고 고칠 수 있는, 혹은 받아줄 학교를 열심히 찾을 수밖에 없다. 잠시 천사 같은 딸과 놀아주는 아빠는 그것이 불만이지만.
해나는 아주 똑똑하다. 몰래 움직이는데도 능숙하다. 이 때문에 이 소녀는 엄마 아빠의 정사를 보고, 엄마 몰래 들어가 엄마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낸다. 아빠의 컴퓨터를 이용해 자신에게 필요한 인물을 찾아내 그 역할에 몰입하고. 이것으로 엄마를 겁준다. 엄마에게 들려준 첫 말도 여기서 나왔다. 첫 시작은 이런 작은 위협이지만 강도가 점점 심해진다. 엄마가 먹는 약을 바꿔 놓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압정을 바닥에 깔아놓는다. 이 강해지는 정도가 이 소설의 긴장감을 점점 고조시키고,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기대하게 만든다. 이런 아이를 마주해야 하는 부모의 심리 묘사도 아주 현실적이다.
작가는 육아의 어려움에 아이가 소시오패스라면 어떨까? 하는 공포를 엄마의 시선으로 그려내었다. 아이가 자라고, 적대감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는 과정을 통해 그 두려움을 단계를 하나씩 높인다. 그래도 엄마라는 모성애 때문에 갈등하게 만들고, 죄책감을 느낀다.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혹시 다른 반전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한다. 엄마가 숨긴 사실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다. 물론 숨긴 것은 있다. 이 소설을 모두 읽고 난 지금 왠지 이 작품의 후속작을 기대하게 된다. 착한(?) 딸로 돌아온 해나가 진짜로 엄마와 대결하는 장면으로 가득한 소설을 말이다. 마지막 문장 “최고로 착한 소녀가 되어야 한다.”가 이렇게 섬뜩하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