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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리커버 에디션) - 까칠한 글쟁이의 달콤쌉싸름한 여행기 ㅣ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1
빌 브라이슨 지음, 김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정말 오랜만에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었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을 읽은 후 그의 진가를 알고 한 권씩 허겁지겁 사 모은 기억이 난다. 그 다음 수순은 언제나처럼 책의 무덤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다 이번에 새롭게 리커버 에디션이 나왔다기에 신청해 읽었다. 결론만 먼저 말하면 이전과 같은 재미는 아니었다. 아마 비슷한 글을 쓰는 작가의 글을 여러 편 읽으면서 신선함이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어쩌면 늦은 밤 피곤한 몸으로 읽으면서, 아니 낯선 지역과 지명 등이 오랫동안 집중하는데 방해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곳곳에서 묻어나는 까칠함과 날카로운 풍자는 책을 계속 읽게 만들었다.
영국의 수많은 도시들을 돌아다닌다. 얼마 전 영국의 도시들을 다룬 팟캐스트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이 책과 관련성은 전혀 없다. 그리고 다른 시각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 두 이야기의 접점을 찾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몇몇 도시에 대한 부분은 나의 영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큰 도움을 줬다. 그 기억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약간의 도움이 되었다. 특히 리버풀 부분에서. 영국이 위치한 곳과 국가 모양은 잘 알지만 유명한 도시들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솔직히 모른다. 런던도 정확한 위치를 찍으라고 하면 엉뚱한 곳에 찍을 것이다. 이런 나에게 각 장의 지도는 좋은 안내도가 되어주었다.
역자 후기를 읽기 전에는 이 여행이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굳힌 결과란 사실을 몰랐다. 여행기를 읽다 보면 이전에 다녀갔다는 글들이 많이 나온다. 아예 첫 장에서는 23년 전 경험을 고스란히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때처럼 도버에 도착해 긴 여행을 시작한다. 이 여행은 대부분 기차로 이동하고, 기차가 없을 경우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속도와 풍경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이제 고속철도로 이동하면서 하나의 지역으로 옮겨가기 위한 하나의 탈 것이 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 철도와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는 웃음을 자극한다.
1995년도 출간된 책인데 삼성이 나와 놀랐다. 그때도 삼성이 그 정도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이라면 쉽게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몇몇 도시에 외국 자본이 들어와 만들어내는 풍경에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는데 그 당시 영국의 경제상황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불과 백 년 전 혹은 수십 년 전에 영화를 누렸던 도시들이 이제는 퇴락한 모습을 보여줄 때 내 고향 도시가 살짝 머릿속을 지나갔다. 서울과 수도권이 거대한 몸집을 부풀려갈 때 한국의 수많은 도시들은 일자리 부족 등의 이유로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방도시 소멸이 떠오른다.
미국인인 브라이슨에게 영국의 유구한 역사와 유적과 유물 등은 부러움의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많이 있고 익숙한 탓인지 이 유적 등을 대하는 모습에 깜짝 놀란다. 건축물의 미관을 해치는 옥스퍼드 총장의 사옥 이야기나 흉물스러운 장치를 주렁주렁 단 건물 등의 이야기는 나도 놀랐다. 한국에서 자주 본 모습이지만 영국까지 그럴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시네라마 이야기는 과거의 기억을 잠시 떠올려주었고, 그림책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란 표현엔 괜히 호기심이 생긴다. 요즘 한국은 차로 가지 못하는 곳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에 이 책 속 몇몇 장소는 나의 관심을 끈다.
그의 여행은 즉흥적인 부분이 많다. 숙소도 현지에서 대부분 결정한다. 훌륭한 게스트하우스를 선택하는데 실패한 이유는 거절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숙소 정보를 미리 확인한다면 조금은 다르겠지만 뭐 이때도 거짓 정보로 사람을 속이는 경우가 많다. 영국인들의 예절과 줄서기 풍경은 아주 놀랍다. 창구가 두 곳인데 줄은 하나다. 그 이유는 그 다음 사람이 빨리 처리된 곳에 가게 하기 위해서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그리고 예산 등의 문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해변을 표시하지 않은 정책을 보고 놀란다. 블랙풀에 멋진 해변이 있는데도. 오랫동안 살았음에도 영국 지역 사투리에 힘들어 하는 모습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탄광촌을 벗어나기 위해 축구선수가 되어야 했다는 지적은 날카롭고 가슴 아프다. 까칠하고 비판적이지만 유쾌하고 날카로운 지적들이 가득하다. 나도 모르게 영국에 대한 애정이 살짝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