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간직한 비밀
라라 프레스콧 지음, 오숙은 옮김 / 현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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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재밌게 읽은 적이 있다. 한참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영화도 본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다. TV에 나오는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을 두고 벌어졌던 몇 가지 에피소드들도 알고 있었다. 이런 가십을 한때는 무척 좋아했었다. 지금 다시 읽으라고 한다면 그 분량 때문에 쉽게 손이 나갈 것 같지는 않다. 20대의 시간은 사실 이런 소설들을 읽기는 최적이다. 물론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이나 깊이는 지금이 더 낫겠지만 일상에서 이런 여유 시간을 내기는 그 시절이 더 좋다. 이 작품이 회상으로 구성된 것처럼 잠시 나의 과거를 회상해봤다.


소설은 모두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처음에 이 사실을 몰랐을 때는 화자가 바뀐 것이 조금 어색했다. 정보국 소속 타자수의 시점에서, <닥터 지바고>의 여주인공 라라의 모델로 알려진 올가 이빈스카야의 시점으로, 정보국 신입 타자수로 입사한 이리나로, 여자 스파이 샐리 등으로 바뀐다. 이 시점의 변화는 처음에는 낯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처한 상황과 심리 묘사에 최적임을 깨닫는다. 자신의 행동과 심리를 이렇게 표현해주니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새롭게 다가와 흥미로웠다. 어떤 장면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전개로 놀라웠다.


이 소설의 시점들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테디가 한두 번씩 나오지만 이것은 그들의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보리스가 나온 경우는 그의 연인이 굴라트로 유배를 간 후 돌아오면서 생긴 순간을 다루고, 테디는 보리스의 소설이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후 러시아 원본을 빼내려고 할 때 나온다. 처음에는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 이야기가 주류였지만 책이 출간된 후에는 이 소설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 등이 조용히 전면에 나온다. 그리고 내가 책을 선택할 때 오해한 부분이 바로 잡힌다. 그 오해는 <닥터 지바고>의 출간이 아주 은밀하고, 출간을 둘러싼 음모가 핵심일 것이란 내용이다. 하지만 진짜 작전은 이 소설의 러시아 판본을 러시아 내부로 보내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쉽게 납득할 만한 내용이 아니다.


동과 서로 책은 구성되어 있다. 동은 러시아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서는 미국 중심으로 유럽으로 공간이 움직인다. 유명 시인 보리스가 소설을 쓴다는 소식과 그가 읽어준 작품만 가지고 올가는 보리스의 아이를 유산하고 굴라트에 갇힌다. 스탈린의 죽음으로 풀려나 보리스를 도와 작품을 완성한다. 작품이 완성되어도 국내에서는 출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다 몰래 접근한 이탈리아 출판업자에게 원고를 넘긴다. 당연히 문제가 되지만 쉽게 그를 굴라트로 보내지 못한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국내외 반응은 아주 흥미롭다. 너무나도 유명하기에 직접 그를 공격하지 못하고 올가가 그 대상이 된다.


이리나와 샐리는 평범한 정보국 여직원이 아니다. 다른 타자수가 회상한 것처럼 이 시절은 남녀 차별이 아주 심했다. 똑같은 학교를 나와도 여성은 기껏 타자수가 되고, 남자는 더 좋은 자리로 옮겨간다. 이렇게 작가는 이 시절의 불평등을 하나씩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 샐리가 2차 대전에서 훌륭한 일을 해내어도 정보국에서 한 자리 차지 할 수 없다. 동성애자란 것이 밝혀지면 공무원 자리마저 잘린다. 시대의 한계와 불평등이 이 소설에는 잘 녹아 있다. 그리고 이리나가 배달원이 되는데 이 일이 어떤 것인지, <닥터 지바고> 러시아 판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금서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과 욕망이 잘 드러난다.


1인칭 화자 시점으로 이어지는 와중에 한 사람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는지 제목의 나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제비에서 정보원과 변절자로, 뮤즈에서 수용소의 여인과 특사와 어머니 등으로, 지원자에서 배달원과 수녀와 학생으로. 이 변화는 자신들이 의도한 것도 있지만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도 적지 않다. 일반적이 않은 상황이 만들어내는 불안은 그 시대의 현실과 연결된다. 지금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것도 그때는 달랐다. 한 작가의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과 그 작품을 둘러싼 정보국의 전략 등은 시점의 변화와 잘 어우러져 가독성을 높인다. 역사적 사실 위에 그 시대의 부조리를 쌓아올려 한 편의 멋진 소설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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