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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평점 :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놀라운 설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민주주의 국가로 포장된 미국이 갑자기 퇴행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억압하게 만든다. 여성들에게 허락된 하루의 단어 숫자는 고작 100단어다. 이 숫자를 넘어가면 그들의 팔찌가 전기 충격을 준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느니 의문이 들지만 작가는 몇 가지 설정을 통해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 가능성의 첫 번째가 바로 소설 속 주인공 진 매클렐런의 친구 재키의 정치 투쟁이다. 하나의 흐름이, 하나의 세력이 강대해지는 데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 중 하나가 사람들의 정치적 무관심이다. 투표의 중요성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빼앗았다는 설정을 보았을 때 오래된 뒤틀린 속담인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가 떠올랐다. 여성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대표적인 속담 중 하나다. 작가가 설정한 이 세계는 이것을 극단으로 몰고 간다. 목소리를 빼앗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직장에서 몰아낸다. 고전적인(?) 여성의 지위로 내려놓는다. 바로 엄마, 아내, 주부 등의 역할이다. 투표권도 물론 없다. 100년 전 세계로의 후퇴란 표현이 소설 속에 나오는데 실제는 더 퇴행한 설정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는 설정은 더욱 놀랍다. 이런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사람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거대한 벽을 세웠다는 것은 또 다른 정치 현실에 대한 역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 중 하나가 독일 나치다. 불과 수십 년 전 독일이 어떻게 나치화 되었는지 보았지 않은가. 가까운 시기로 오면 아프리카의 인종 대학살이나 보스니아 사태나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중국 천안문 사태까지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가능성이 일어났다. 이 소설 속 순수운동이 정치권력을 삼켰을 때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고 그 탄압에 도망치거나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변한다. 재키가 방송에 나와 다른 패널들과 싸울 때 상대방이 내민 왜곡된 정보를 믿고 투표한 이들이 어떻게 피해자가 되었는지 보여준 장면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진은 실어증 치료에 혁신적인 혈청 개발 전문가다. 한때 박사였지만 엄마와 아내로 집에 머문다. 하루에 말할 수 있는 단어의 개수는 100개다. 아이에게 자기 전 동화도 읽어줄 수 없다. 이 정책의 무서움은 성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 아이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잠을 자다 잠꼬대를 해도 카운트된다. 이 팔찌가 얼마나 무서운 장치인지 보여주는 장면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장치를 이용한 자살 시도다. 엄청난 고통을 견뎌야만 가능한 자살이지만 그 상황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의 놀라움 중 하나가 이런 극단적 상황을 연결해 이 현실의 무서움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런 정책의 바탕이 되는 것의 이름을 ‘순수운동’이라고 한 부분은 언어와 정치를 잘 엮어 표현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정치 표어나 단체들이 실제 행동과 다른 단어나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진이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계기가 바로 대통령 형이 실어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팀이 연구했던 혈청이 필요하다. 베르니케 실어증 연구를 계속하라는 압박이 온다. 이 연구에 참여하기 위해 그녀는 몇 가지 계약을 하지만 이런 독재 국가에서 이런 계약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녀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성공할 때까지는 가능할 것이다. 이 과정 속에 일어나는 가족의 갈등과 외도와 현실의 문제들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런 정치적 흐름 속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열광적으로 호응하는 무리 중 하나는 십대 청소년들이다. 엄마와 고등학생 아들 스티븐의 갈등과 대립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실제 이런 정치적 억압 시기가 길지 않고 상황도 미국만으로 한정되어 있으면서 전체 구성에 약간의 어색함이 생긴다. 나중에 딸에 대한 부성애가 하나의 돌파구처럼 작용하는 것은 이 전체 설정이 약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한 반전이 내가 예상한 것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조금 아쉽다. 한 국가의 디스토피아 상황을 멋지게 설정하고 사고 실험을 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개인에게 수렴되는 해결방식은 재키의 외침과 동떨어져 있다. 아마도 내가 이 소설의 놀라운 설정과 전개에 감탄하면서도 뭔가 저항에서 아쉬움을 느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생각할 거리와 역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 굉장히 지적이고 위험하고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