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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평점 :
한국형 하드보일드 소설이란 말에 혹했다. 읽으면서 하드보일드 소설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무뚝뚝한 택배기사란 사실을 지우면 택배기사의 고단한 삶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빠르게 물건을 배송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그가 만난 진상들이, 예상하지 못한 몇 가지 행운들이 이 일과 관련되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서울 상경과 동시에 택배기사가 되고, 몸을 놀리기 바빠 딴 생각할 틈도 없는 택배의 고됨이 나열된다. 이전에 본 만화 <까대기>가 연상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인물 몇 명이 나오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바뀐다.
가장 이상한 인물은 그에게 담배 한 대를 빌려 피우는 여자다. 이 여자는 자신이 우울증 환자였다고 말한다. 나중에는 자신과 하루 동안 만나면 일당 백만 원을 주겠다고 한다.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다. 이 만남 속에서 그는 그녀의 과거 사연을 듣고, 예상하지 않은 만남을 만들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동네 바보도 한 명 등장한다. 그가 마이클이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택배 운송 중 고등학생들에게 구타당하던 그를 구해준다. 이때 그가 보여준 침착함과 과장된 지식은 눈길을 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런 모습을 보여줄까. 하지만 사건해결은 공권력에 맡기는 현실적인 선택이다.
같은 구간을 계속 배송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만난다. 유명한 경제학 교수가 그렇다. 그에게 자신에게 수업을 받으라고 말한다. 나의 눈길이 간 부분은 이 상황이 아니다. 그가 어떻게 그 교수의 정체를 알았을까 하는 것이다. 정치인이었거나 방송에 자주 나오는 교수가 아니면 보통 알기 힘들다. 여기에 특정 시간에 배송해달라는 바의 주인이 있다. 알고 보니 그 바가 게이바다. 이 바를 통해 그가 위스키를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코냑은 싫어하고. 위스키라면 그가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주기 충분하다. 한 택배 기사의 사연도 이 술 때문에 들어주었다.
택배기사이다 보니 주변 동료가 없을 수 없다. 택배기사들의 사연 몇 가지가 나오고, 이들의 만남 속에 그의 일상이 드러난다. 일이 끝난 후 책을 읽고 술을 마신다. 그가 읽는 책들이나 인용하는 문구들은 내 취향과 비슷하다. 좋아하는 장르 이야기는 눈길을 끈다. 작가 후기에 켄 브루언의 <런던 대로>가 나왔을 때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속에 그의 실명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행운동 담당이라 행운동이라고 불린다. 다른 택배기사도 별명으로 불린다. 택배 배송 중 생긴 몇 가지 에피소드는 읽으면서 통쾌함을 느꼈다. 단돈 몇 천 원에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일침을 가하기 때문이다. 말 한 마디에 바뀌는 그의 행동을 보면 또 다른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간결한 문체에 군더더기 없는 진행과 까칠한 캐릭터는 재밌고 잘 읽힌다. 몸으로 움직이면서 딴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 노동자인 택배기사를 내세워 우리 주변 인물들을 삶을 보여준다. 다양한 사연들과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 소설 제목의 침입자들은 주인공 행동동의 삶 속으로 침입한 수많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가 바란 것은 업무 후 술 한 잔과 독서일 뿐인데. 이런 분위가 뒤로 가면서 조금씩 뒤틀리고 현실에서 살짝 벗어난다. 어떻게 보면 과장되었거나 뜬금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숨겨진 과거는 언제나 설레고 기대하게 된다. 영화 <셰인>처럼.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검색되지 않는데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행운동이 주인공인 소설이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