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48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3월
평점 :
어딘가에서 한 번 들어본 듯한 이름이지만 낯설다. 동서문화사 판 <디미트리오스의 관>은 조금 더 낯익다. 제목과 작가 이름이 쉽게 연결되지 않는 것은 수많은 작품들에서 흔하지만 이렇게 많은 수상을 한 작가를 몰랐다니 놀랍다. 인터넷서점 검색을 하니 딱 두 권만 보인다. 이런 작가이니 내가 모를 수밖에. 한국의 장르문학 번역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현대 스파이 소설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작가의 작품이 딱 한 권 번역되었다니 말이다. 이번 기회에 더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개인적 바람은 뒤로 하고 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스파이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화자는 래티머란 추리소설가다. 원래 그는 정치경제학 교수였는데 추리소설이 성공하면서 전업작가가 되었다. 이스탄불에 와서 하키 대령이란 인물을 만난다. 그는 추리소설을 쓸 시간이 없어 자신의 아이디어를 래티머에게 제공하려고 한다. 그런데 래티머의 시선을 끈 것은 그의 초보적인 트릭 등이 아니라 디미트리오스란 인물이다. 하키 대령에게서 이 인물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이 정보를 가지고 디미트리오스가 살았고, 문제가 있었던 장소를 방문해 그와 그가 관련된 사건 정보를 수집한다. 소설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스파이의 과거를 뒤쫓는 소설이다. 결코 스파이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소설이 아니다. 작가가 정보를 확인하고 추적하는 과정은 그 시대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터키와 그리스의 갈등, 발칸 반도의 공산화, 각 국가의 이익을 위해 활약하는 스파이들의 정보전 등이 중심에 놓여 있다. 만약 이 시대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면 횡간에 숨겨진 더 많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작가가 이 시대를 어떻게 보고 해석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아는 것은 터키와 그리스의 전쟁 밖에 없다. 이 두 나라가 얼마나 잔혹한 행동을 했는지만 알고 있다. 바로 이 시대에 디미트리오스가 살인자로 이름을 올린다. 그의 수많은 인생 역정 중 첫 발자국이 바로 이때다.
디미트리오스의 삶을 들여다보면 악의로 가득하다. 유대인의 돈을 훔치기 위해 살인을 하고, 정치암살범이 되고, 스파이로 활약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마약을 팔면서 자신의 동료를 고발하고, 인신매매업도 했다. 이 과정에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협박하고, 구걸하는 등 필요한 모든 행동을 다 한다. 마지막에는 신분세탁을 한 후 국제금융기관의 이사까지 된다. 이런 과정을 뒤쫓는데 단순히 인물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습도 같이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에 속도감은 조금 떨어진다. 스파이소설이 가지는 긴박감이나 스릴감은 감소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아는 만큼 재미를 더 누릴 수 있게 만들었다.
솔직히 터키에서 발견된 디미트리오스의 정체는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그럼 다른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래티머가 각 도시를 돌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디미트리오스를 두려워하고, 그의 죽음에 안도한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 인물이 바로 래티머가 파리에 오면 50만 프랑을 주겠다고 제안한 피터스 씨다. 그와의 만남은 디미트리오스의 실체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만든다. 그리고 이 인물이 보여주는 이중성과 악의 기록은 결코 그도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인물들 사이에 놓인 래티머가 보여주는 행동과 실수와 우연은 후반부에 긴장감을 불어넣어준다. 마지막 장면에 대한 역자의 해석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시간 나면 서로 다른 판본의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는 재미도 누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