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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평점 :
<레베카>의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초기 단편들을 연대순으로 실은 작품집이다. 이때 말하는 연대순은 발표가 아니라 창작한 순서다. 마지막 작품 일러두기에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다. 처음 이 단편집을 선택할 때 집에 고이 모셔두고 있는 단편집 <새>의 작품들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목차를 보니 다행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이 작가의 작품을 두 번째 읽는다. 첫 번째는 당연히 <레베카>다. 오래전 영화로 보고 소설을 다시 읽었는데 취향을 조금 타는 작품이었다. 히치콕의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고 할까. 단편은 어떤 느낌일까? 이 호기심에, 작가의 명성에 선택했다.
작가가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에 걸쳐 쓴 열세 편의 초기 걸작 단편을 모아 낸 선집이라고 한다. 이미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대프니 듀 모리에> 세계문학단편선을 내놓았는데 뭐지? 하는 느낌도 있었다. 오늘 목차를 찾아보니 이 작품집에 <새>가 실려 있다. 당연히 내 머릿속은 히치콕의 영화가 먼저 떠오른다. 영화 이미지와 단편의 이미지를 비교하고 싶은 작은 욕망이 꿈틀거린다고 할까. 개인적으로 현대문학의 세계문학단편선을 재밌고 읽었고 좋아하기에 언젠가 다른 출판사 <새>와 비교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물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초기작이라 섬세하지 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뭐지? 하는 느낌과 함께 강한 인상을 남기고, 어떤 작품에서는 가볍게 웃게 만든다. 형식도 장르도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편지>는 제목대로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욕망에 불타는 남자가 그 욕망을 채운 후 일어나는 일을 간결한 편지 등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형식도 심리적 표현도 멋지다. <주말>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행복한 연인이 난파되면서 마주하는 현실은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성격 차이>의 부부가 보여주는 심리 묘사에 대한 결혼 전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차갑고 냉혹한 현실을 극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표제작 <인형>은 섬뜩하다. 우연히 바닷가에서 발견한 수첩의 기록이란 설정으로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내용은 해설의 섹스돌과 관련 있다. 화자를 매혹시킨 그녀 리베카의 키스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기괴하다. 첫 발표작인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는 위선적인 신부 이야기다. 계급과 신분상승의 욕망을 뒤섞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결말과 신부의 심리 묘사가 인상적이다. 이것은 첫 작품 <동풍>에서도 그랬다. 거칠고 황당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 읽으면서 에스키모인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피카딜리>는 하층민 여성의 추락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기꾼 남자에게 빠진 그녀가 잘못된 선택과 그 후의 삶이 여운을 남긴다. 이 단편은 <메이지>의 일상과 이어진다. 자신의 현실과 동떨어진 결혼식을 응원하는 매춘부의 모습이 씁쓸하다. 욕망에 불탄 24살 신랑의 황당한 첫날밤 도전기가 황당하고 놀랍도록 웃음을 짓게 하는 <절망>은 마지막 문장에서 빵 터진다. <해피밸리>의 사랑스러운 연인들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오래가는 아픔은 없다>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스스로 속이고 왜곡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 탁월한 심리 묘사는 읽으면서 감탄하게 만든다.
<집고양이>는 한 남자를 둘러싼 두 여성의 긴장과 엇갈린 갈등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생각과 다른 두 어른의 반응은 은밀하거나 노골적이다. 은밀한 것은 남자의 유혹이고, 노골적인 것은 엄마의 감정이다. 마지막 작품인 <인생의 훼방꾼>은 지나온 자신의 삶을 들려주는 방식이다. 제목과 화자의 이미지가 겹치지 않는데 내가 잘못 읽은 것일까? 전체적으로 열세 편의 단편들은 놀라운 심리 묘사와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통찰력을 보여줬다는 사실에 놀란다. 다른 단편들에도 다시 한 번 더 관심이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