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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봄 - 하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8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0년 3월
평점 :
개인적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현대물을 더 선호하고, 읽고 싶지만 최근에 나오는 책들은 대부분 시대물이다. 낯선 시대의 낯선 문화를 다룬 시대극의 경우 초반에 진입장벽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일본 문학을 비교적 많이 읽은 나도 이 시대극으로 들어가면 용어나 지위 등에서 잠시 혼란을 느낀다. 이 작품도 그렇다. 에도시대 작은 번 기타미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는데 처음 한 아이를 안고 도망 온 유모를 보고 이 아이가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란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 아이는 하나의 사건으로 인도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 그리고 기타미 번 상황을 설명하면서 조금 느리게 이야기가 펼쳐진다.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이다. 초반에 조금 적응이 필요하다. 에도시대 계급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고, 앞으로 펼쳐질 사악하고 참혹한 사건을 파헤치고 풀어나가는데 필요한 설정들을 하나씩 깔아놓았다.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다키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번주의 별저인 고코인으로 오는 과정은 소문과 예상하지 못한 과거가 엮여 있다. 아름다운 청년 번주 시게오키가 요양으로 유폐되었다는 소식이 있지만 자신이 그곳으로 불려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또 그곳에서 죽었다고 소문난 이토 나리타카까지 있을 줄이야. 사실 그녀가 불려온 이유는 모계 쪽의 강령술 미타마쿠리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이 주술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이토가 어머니의 조카인줄도 당연히 몰랐다.
그녀를 데리고 온 인물은 사촌동생인 다지마 한주로다. 다키를 연모했던 소년이다. 그에게 명령을 내린 인물은 한때 에도 가로였던 이시노 오리베다. 이시노는 6대 번주였던 시게오키를 치료하려고 한다. 이 치료를 맡은 인물은 서양의사에게 배운 시로타카 노부로다. 이토는 시게오키가 사령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하고, 해결할 방법 중 하나로 유일한 혈연인 다키를 지명했다. 이것은 이토가 시게오키의 다양한 모습과 그의 고향인 쿠리야의 학살을 연결하면서 내린 결과다. 처음 이 전개를 보고 약간의 판타지적 상상을 했다. 사령에 사로잡혀 본성을 잃은 번주의 착란을 예상했다. 하지만 시로타카는 다르게 해석한다. 현대의학에서 다루는 다중인격으로 본다.
사령이든 다중인격이든 이 일에는 원인이 있다. 이토의 접근법은 원령들이 복수를 하는 것이고, 시로타카는 번주 시게오키가 경험한 일과 관계있다. 무엇이 원인일까? 사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6년 전에 있었던 쿠리야 일문 학살 사건을 파헤쳐야 한다. 이 일은 한주로가 맡는다. 작은 마을을 없애려면 적지 않은 힘이 필요하다. 혹시 전대 번주나 가로들이 뒤에 있는 것을 아닐까? 이런 경우 고코인을 관리하는 이시노와 가로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런데 한주로가 조사하는 와중에 이상한 실종 사건들이 드러난다. 몇 년 간격으로 열 살 전후의 남자 아이들이 사라진 것이다.
6대 번주 시게오키는 고코인에서 나리마님으로 불린다. 이곳에서 일하는 무사나 하인들은 나리마님의 정체를 안다. 이시노가 쓸 데 없는 소문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알렸다. 한주로가 과거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나간 사이 이토도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에 작은 호수에서 다키 등은 아이의 유골을 찾아낸다. 이 일이 시게오키의 다른 인격 혹은 사령 중 하나를 깨어나게 한다. 다키와 의사 등이 시게오키를 만나 대화를 나누다보면 어린아이가 나오는데 이름이 고토네다. 순진한 아이의 모습인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이 사연을 하나씩 파고들다보면 시게오키에게 일어난 참혹한 과거가 드러난다.
소년들의 실종과 시게오키에게 벌어진 일들은 현대 범죄물에서 자주 다루어진 소아성애자를 연상시킨다. 작가는 현명한 5대 번주의 어두운 악행을 그대로 까발리기보다 더 깊은 이면으로 들어간다. 시게오키에게 벌어진 현상은 현대의 다중인격이지만 5대 번주인 나리오키가 벌인 악행은 또 무엇인가? 그 악행의 현장에 같이 있던 여자의 존재는 또 무엇인가? 작가는 여기서 한 번 더 들어가 이야기를 비튼다. 앞에 예상한 흐름을 바꾼다. 이 과정 속에 액션이나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여주기보다 그 일이 벌어졌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를 구한다. 속도감보다 사람 이야기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개인 취향을 많이 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