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의 눈물
권지예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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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권지예의 단편집이다. 2000년대 초반 화려한 수상 이력 때문에 기억하고 있고, 신작이 나오면 관심을 둔다. 그런데 이번에 검색해보니 실제 읽은 책은 거의 없다. 한창 문학상 작품들을 읽을 때 읽은 기억 때문에 작은 오류가 생긴 모양이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10년 만에 낸 단편집이라고 하는데 이 책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들은 최근 2~3년 안에 발표한 것들이다. 최근에 다시 한국 단편들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예전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작가들이 다루는 소재나 공간 등이 이전과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번역 소설이나 장르 소설들을 주로 읽다가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 예상하지 못한 정갈한 문장들에 잠시 빠져든다. 아마 내년에는 찜해놓은 몇 권의 단편을 더 읽을 것 같다.

 

하정우가 여행 욕구를 불러온다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 나는 그런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여행의 즐거움보다 그 여행이 던져준 상황이나 현실이 결코 즐겁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열렬하게 가고 싶었던 쿠바에서의 일상을 다룬 <베로니카의 눈물>은 물자 부족과 빈곤한 현실이 먼저 눈에 들어와 괜히 불편하다. 관광을 왔다가 마음에 들어 독채를 장기 렌트한 소설가 화자가 마주한 아바나의 현실은 기대와 너무 다르다. 몇몇 가지는 알고 있는 현실이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삶으로 보면 다르게 다가온다. 이중 물가제를 이해한다고 해도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물자는 한국 사람에겐 너무 힘들다, 여기에 집 관리인 베로니카에 대한 오해와 친밀감은 읽는 내내 불편하다.

 

<낭만적 삶은 박물관에나>는 사진 작업 차 다시 파리를 찾은 재이의 파리는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몰래 연인들의 사진을 찍어야 하고, 비싼 식당 음식 대신 집밥으로 끼니를 떼워야 한다. 여기에 이혼한 남편과의 기억은 비참하기까지 하다. 혹시 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은 낭만과 욕망의 엇갈림을 잘 보여준다. 다시 쿠바 이야기를 다룬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은 남편이 유품으로 전달해달라는 상자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노력을 다룬다. 믿고 싶지 않고 피하려고 한 사실을 쿠바의 낯선 현실 속에서 마주한다. 쿠바 민중의 척박한 삶과 대비되는 자본의 유입과 성장은 우리 사회의 고도 성장기 이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부유하게 사는 친구 부부의 세미나에 대리 출석한 모녀의 미투 이야기다. 시간이 흘러 성에 대해 관대해졌다고 해도 어두운 곳에서 벌어지는 성폭행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성폭행 문제에서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고민하고 고통 받는 현실을, 미투 고백의 어려움과 현실적 문제 등을 잘 녹여내었다. 현주의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란 부분이 가슴 아프다. <카이로스의 머리카락>은 빽빽한 일정의 패키지여행 속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와 화자 부부의 이야기가 같이 나온다. 단체 여행이 주는 불편함과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간결한 이야기 속에서 잘 녹여내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 회상이란 부분에서 조금 낯설었지만 삶은 이런 기억들이 쌓인 것이다.

 

유일하게 한국을 배경으로 한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는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대학원을 다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고, 부잣집 딸로 생각한 친구의 소개로 키스방과 그 다음 단계로 나선 여인과 소득 1% 삶을 살다가 실업자가 되어 추락한 가장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풀어낸다. 이 둘이 머무는 공간은 최악의 공간인 고시원이다. 여자는 오피걸로 돈을 벌고, 남자는 퇴직금을 까먹고 있다. 자신들의 현실을 가족들에게 속이고 있다. 뻔한 결말로 나아갈 것이란 나의 예상은 현실 앞에 가볍게 무너졌다. 이 여섯 편의 소설을 재밌게 읽은 듯한데 불편함이 가득하다. 이 여섯 편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은 뿌리내려 사는 곳이 아니라 잠시 동안 머물다 갈 곳들이다. 일상을 벗어난 곳의 일상은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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