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 정신질환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그 혼돈의 연대기
론 파워스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현병이란 병명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얼마 전 있었던 범죄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 이름인 정신분열병은 아주 낯익다. 솔직히 이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론이 이것을 부채질했다. 이전에 본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이런 환자들이 일으키는 사건 사고를 다루었다. 이런 간접 경험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시선을 결코 좋은 쪽으로 돌려놓지 못한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자를 무서워하고, 일부의 사람들은 격리 등을 말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두 아들 모두 조현병을 앓았고, 그 중 한 명이 자살한 퓰리처상 수상작가 론 파워스가 이 병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2005년 7월 3일 둘째 케빈이 집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3년이나 조현병에 걸려 있었는데 극단적 결정을 한 것이다. 5년쯤 뒤 첫째 딘마저 조현병 증상이 나타났다. 부모 입장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일 것이다. 작가는 이 사실을, 아니 자신의 개인적 가족 이야기를 쓸 마음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을 쓸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상처받길 바란다. 솔직히 말해 상처보다는 내가 알고 있던 정신 질환을 다시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작가는 흥미위주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고, 이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우받았는지 알려준다.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앞에 놓으면서 결말에 대한 호기심을 차단했다.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하나는 작가의 아이들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이 어떤 대우, 처방, 치료 등을 받았는지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읽기 편한 것은 아이들 이야기지만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정신질환을 둘러싼 사실들이다. 아이들 이야기는 가족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 남녀가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은 평범한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그리고 둘째 케빈이 기타에 재능이 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같은 나이 또래 전국 경연에서 우승하고, 좋은 대학도 들어간다. 부모 입장에서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정신질환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첫째 딘은 약간의 음주와 운전 미숙으로 여자 친구를 크게 다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이 여자 친구 부모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음주운전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양이지만 언론 등은 음주 사고로 확대했다. 여친의 부모는 딘을 용서하지도 않고 소송까지 건다. 열여섯 소년은 작은 마을에서 음주운전 사고자로 낙인찍힌다. 판사는 집행유예라는 판결을 내렸고, 아이는 평생 이 굴레를 쓰고 있어야 했다. 문제가 생기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공포와 더불어 말이다. 그는 매력적이고, 정치적 활동을 잘 해 정치인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현병 증상이 나타나면서 부모를 걱정과 공포 속으로 밀어넣었다.

 

조현병의 원인은 다양하다. 유전적인 것부터 외부환경적인 것까지. 현대는 정신질환자가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작가는 이 정신질환자를 사회가 어떻게 다루었는지 다양한 사실들로 보여준다. 정신질환자를 수용하는 시설의 설립과 이 시설들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그것이 현대에 어떻게 재현되었는지 알려준다. 우생학에 대한 글에서는 결코 나치에게 모든 죄를 떠넘기지 않는다. 서양의 많은 학자와 지식이 이것을 얼마나 환영했는지 말한다. 우생학의 파편들이 우리 삶에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불편한 사실이다.

 

프로이트에서 시작한 정신의학은 어느 순간부터 항정신병 약으로 대체되었다. 나 자신도 이 약들 이름 몇 가지는 알고 있다. 정신과 의사들이 이제는 이 약을 처방하는 기계처럼 변했다는 말과 함께 이 약들을 제조 판매하는 회사들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창출하고 있는지 알려줄 때 이 부분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약들의 한계와 부작용 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신질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몇 가지 시술은 끔찍할 정도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 시술자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이런 약들이나 시술 등이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 환자 관리의 편리를 위한 것이란 느낌을 강하게 던져준다.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이다.

 

점점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세금 지출이 늘어나고 있다. 이 돈의 많은 부분이 제약회사로 흘러들어간다. 이들의 고통이 장기화되고 상태가 악화된 부분적 이유로 사법제도 자체의 불안정성을 말한 부분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정신의학 전문가들의 서로 상충하는 주장에 의해, 정신증에 걸린 사람의 고통 경감보다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유지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이들을 과도하게 경계하는 사람들에게 의해 흔들려왔다는 대목이다. 이 글의 몇몇 단어만 바꾸면 우리 사회의 많은 이야기에 적용 가능하다는 사실에 읽으면서 놀랐다.

 

원제목은 ‘미친 사람한테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지만 번역되면서 병명과 부모의 감정을 더 부각시켰다. 사실 이 말은 경찰이 한 말이기도 하다. 경찰들이 정신질환자를 어떻게 다루고, 이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작가는 예를 들어 이야기한다. 늘 미국의 경찰 대응을 볼 때면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작가가 버몬트주에 살게 되어 다행이라고 느끼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도 경찰과 관련된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누군가는 미친 사람에게 신경을 쓴다’고 하면서 약과 격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이들을 치료하는 노력을 소개한다. 묵직하고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나의 인식을 새롭게 만들었다.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