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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4월
평점 :
세계문학상 수상작 <컨설턴트> 이후 처음으로 이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한국 문학을 많이 읽지 않다 보니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작가의 작품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나의 뇌세포는 가끔 오랜만에 책을 내었다는 착각을 한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도 그랬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니 낯익은 표지와 제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제목과 표지들이 작가의 이름과 연결되지 않고 단순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책 정보를 볼 때면 더 심해진다. 하지만 이 단편집을 읽은 지금 작가의 이름은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다양한 장르를 담고 있다. 작가의 말을 보면 간단한 작품 해설을 달아 놓았는데 단편만큼 재밌다. 여기에 소설집의 콘셉트가 나온다. “니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닥치는 대로 준비했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아이돌 그룹 구성 원리와 동일하다고 하는데 이 단편집을 다 읽은 지금 동의한다. 여섯 편이 모두 장르가 다르고, 개성 넘치고, 유머 있고, 기묘하고, 재밌다. 어떤 작품은 장편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작가의 말을 읽고 포기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첫 작품 <몰:mall:沒>은 마지막 문장을 읽고 세월호가 떠올랐다. “망각했으므로 세월이 가도 무엇 하나 구하지 못했구나.”란 문장이다. 실제 작가의 말을 보면 세월호 관련 단편이다. 하지만 이 단편에서 다루고 있는 비극은 삼풍백화점 참사다. 아직도 기억한다. 2년 연속으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우리의 망각이 만들어낸 비극이 세월호임을 작가의 이 간결한 문장 속에 녹여내었다. 1995년 6월의 참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군제대한 복학생의 일상으로 담담히 진행한다. 상상력은 나쁜 쪽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현장의 쓰레기와 함께 옮겨진 사체들로 이어진다. 서늘하고 가슴이 아프다.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은 삼성가의 비자금과 맞물려 있다. 그 당시까지 세금의 사각지대에 있던 미술품이 언론의 조명을 받으면서 한동안 시장이 경직되었다. 작가는 이 시기에 몰락한 화상을 통해 그 당시 미술시장 현실을 보여준다. 설계된 전시와 비자금 조성을 위한 미술품 거래가 어떤 의미인지, 지금 거액으로 거래되는 미술거래의 이면에 또 의미가 있는지도. 후반부 전시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기괴하고 역설적이다. 서서히 잠식하는 공포를 단숨에 바꾸는 단어 라이선스의 등장은 놀랍다. 이로써 전시회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서울전으로 이어진다.
<계절의 끝>은 장편 개작을 기대했던 작품이다. 인류의 종말을 다룬 간결한 작품인데 머릿속에 온갖 작품들이 오간다. 공룡 등이 멸종한 것처럼 인류도 멸종할 수 있다는 조건에서 시작해 황량한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편지라는 아날로그 감성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이것이 인류의 멸종을 더 부각시킨다. 높은 건물에 올라 석양을 바라볼 때 본 풍경과 지하철의 많은 물들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삶의 욕구가 만들어낸 식욕은 어린 생쥐를 날것으로 씹을 정도다. 다른 생존자들이 보이지 않고, 교류가 없는 것은 조금 아쉽다.
<사장님이 악마예요>는 오컬트 블랙코미디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보다 잘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실제 악마가 등장해서 현실의 삶을 설명해줄 때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에 내가 농담처럼 했던 말들이 이 소설 속에서는 현실로 등장한다. 아이를 가지기 위해, 육아휴직을 사용하기 위해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과 걱정을 하는지도. 죄 지은 자가 많아 지옥의 과포화가 문제라는 악마의 걱정과 고민이 출산 반대로 이어질 때 이 역설이 재밌다. 지옥행을 막기 위해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이 역설도 마찬가지다.
<불용>은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 관보다 작은 공간에서 열쇠를 깎고, 큰 책을 펼칠 수 없어 시집을 접어 읽는 그의 모습은 아주 비현실적이다. 뚫은 가슴에 열쇠를 꽂아 기억을 여는 모습은 아련하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을 듯한데 잘 모르겠다. <인류 낚시 통신>은 <은어 낚시 통신>의 패러디다. 원작을 읽었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한때 윤대녕의 소설을 좋아해 열심히 읽은 적이 있기에 읽은 듯하지만 자신할 수 없다. 인터넷에서 자극적인 제목으로 낚시질 하던 그가 한 통의 초대장으로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은 현재 한국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비밀결사처럼 모여 그들이 내뱉는 말 속에서 정치와 경제 등의 기득권층이 가진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암울한 내용이지만 재밌다. 다시 <은어 낚시 통신>을 읽고 이 단편을 떠올리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