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야 - 2019년 제15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다이앤 리 지음 / 나무옆의자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해외 거주 한인의 소설들이 문학상 수상작을 내고 있다. 이 소설은 제15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장편 문학상이라 선택에 주저함은 없었다. 하지만 모두 읽은 지금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다른 환경, 다른 문화, 다른 지역, 다른 성별, 다른 경험들이 읽는 내내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워놓았다. 그녀가 부모에게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그녀가 누리고 있는 삶의 부유함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가늠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이지만 말이다.

 

화자는 이란 남성과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다. 살고 있는 곳은 캐나다 밴쿠버다. 실제 작가도 캐나다 밴쿠버에서 남편과 딸 하나를 두고 살고 있다. ‘몇 해 전 겪은 교통사고를 계기로 오랫동안 감춰왔던 고통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회복하기 위해 쓴 첫 소설’이라고 하는데 이 둘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떻게 보면 저열한 호기심일 수도 있지만 소설 속에서 이란 남편과 공감하는 이야기들이 실제 경험담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같은 국가라도 지역과 소득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경험을 생각하면 이 소설 속에서 표현된 비슷한 경험은 놀랍다. 그리고 수없이 많이 생략된 그와 그녀의 이야기는 또 언젠가 다른 소설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로야는 페르시아어로 꿈이나 이상을 뜻한다. 이 어린 딸 이름이 제목이지만 딸 이야기를 중심에 놓지는 않는다. 화자는 자신의 고통과 과거의 기억을 풀어놓고 그 속에서 이 아픔의 근원을 찾아간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아파할 때 만난 치료사의 감정 치료가 효과를 볼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 그 치료는 중단된다. 이때 그녀가 울면서 풀어놓고 토해낸 감정들은 억제되고 억눌렀던 기억들이다. 한국 소설에서 자주 본 가정사의 단편들이 이 소설 속에서도 반복된다. 가장 폭력, 부모와의 갈등, 이해하려는 마음, 비교하는 삶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에 뿌리를 두고, 7~80년대를 산 사람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이 부부가 탄 차가 교통사고 났을 때 상황만 놓고 보면 큰 부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늘 듣는 말대로라면 교통사고 후유증은 그 이후에 나타난다. 화자도 그렇다. 응급실에 가지만 외상이 보이지 않다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이 고통은 이후 그녀 삶을 지배하고, 이 고통 속에서 과거의 기억들은 고개를 삐쭉 내민다. 육체의 고통이 정신의 고통을 불러오고, 기억은 살면서 느낀 불만과 아쉬움을 되돌아보게 하고,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아간다. 7년 만에 핀 꽃을 보고 그녀가 해낸 해식과 엄마의 대답은 이 엇갈린 감정과 해결책을 아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안다고, 이해한다고, 공감한다고 할 때도 이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읽으면서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관계와 작가가 다루지 않은 몇 가지 상황에 관심이 갔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가끔 보고 듣고 한 좋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식에게 효를 강요하고, 어떤 비난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임신한 딸이 묵은 짐들이 가득한 집을 청소하게 만들고, 자신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면서 아닌 척한다. 왜 이런 관계를 끊어내지 못할까? 혈연관계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떨쳐내지 못한 감정들 때문일까? 어쩌면 화자는 엄마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낸 화나 짜증 등을 생각하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개인적 호기심인데 작가는 교통사고 뒤에 일어나는 보험 등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는다. 보통 이런 사고 다음에는 이 사후 처리가 상당히 번거롭다. 그리고 아빠의 기일을 동생네가 음력으로 정했는데 이 이유도 설명하지 않는다. 엄마가 아빠 기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욕할 때 엄마의 감정은 뭘까? 몇 주의 만남 끝에 결혼한 이 부부가 어떤 감정의 교류가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남편이 이란을 떠났을 수밖에 없던 이유도. 평화로운 지역으로 알고 있던 밴쿠버에서 총기 사고가 있었다는 점은 놀랍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평론가가 속문주의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참 구린 표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