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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 내 기억이 찾아가는 시간
하창수 지음 / 연금술사 / 2019년 1월
평점 :
가독성은 좋은데 내용은 어렵다. 이런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더 어려울 수 있다. 작가가 인용한 문장들과 그가 설정한 과학 기술 등을 이해하려면 제목처럼 미로 속을 헤맬 수 있다. 가까운 미래인 2041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뉴사이언스 소설이라고 하는데 세계의 변화가 너무 심하다. 물론 이런 급격한 변화가 가능하다. 이 가능성을 인정하고 넘어가는 데는 급속한 과학의 발전이 한몫했다. 중국의 몰락 이유를 사막화라고 하는데 과연 이것이 20년 만에 가능할까? 그리고 이 몰락을 중국이 그대로 받아들일까? 현재 중국을 생각하면 쉬운 일이 아니다.
미로. 이 이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아름다운 길(美路)이란 의미와 미로 찾기에서 말하는 미로(迷路)다. 설정 속 미로는 천재형이다. 그의 아버지 윤승준 박사는 과학자보다 소설가로 더 유명하다. 필명은 닥터 클린워스다. 재밌는 설정 중 하나는 닥터 클린워스의 소설을 원전 삼아 쓴 혼성모방 소설이 더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작가는 데일 볼룸이란 영국 작가다. 단순히 프로그램을 돌리는 수준을 넘어 새롭게 해석하고 이야기를 더 멋지게 만든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보다 더 귀중한 존재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생존 작가를 이렇게까지 평가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 미래의 한반도는 통일되었다. 세계는 크게 두 개의 권역으로 나뉜다. 미국과 유럽이다. 중국이 몰락하면 이렇게 권역이 나뉠 수밖에 없다. 통일 한국의 서울은 자유구역으로 바뀌고, 원산은 첨단산업도시가 된다. 다국적기업들이 원산에 모인다. 슈퍼퓨처사도 이곳에 회사를 둔다. 미로가 일하는 곳이다. 미로가 하는 일은 그의 아버지가 소설에서 주장한 스피릿 필드를 구현하려는 것이다.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서 작은 스피릿 공명 위성에 필요한 데이터를 조금씩 입력한다. 조금씩이라고 하지만 그 데이터의 양은 결코 적지 않다. 이런 작업이 가능한 것은 슈퍼퓨처사의 회장이 아버지의 글에 감명 받은 것도 있지만 돈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시간과 죽음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한다. 14년 전 죽은 아버지로부터 온 메일, 아버지의 의문사, 그리워하는 죽은 친구 유리, 유령 같은 존재로 등장하는 이상한 존재 등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여기에 죽은 사람의 혼령과 만날 수 있는 ADM이란 장치가 등장하여 더욱 미로 속을 헤매게 한다. 후반으로 가면서 이 장치의 존재가 더 큰 의미로 다가오고, 닥터 클린워스의 꿈이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다. 작가는 작가인 닥터 클린워스의 소설을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복잡하고 풍성하게 만든다.
작가는 인턴벤션이란 설정을 통해 작품에 강하게 개입한다. 이 설정을 위해 프롤로그에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건 2019년이다. 하지만 이 소설인 쓰인 것은 2041년이다.”라고 말한다. 출간 작가와 쓴 작가가 동일한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작은 장난을 친다. 인턴벤션의 과도한 개입은 미로의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고, 작가의 주석들이 이야기 속에 난입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작가가 설정한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만들어주지만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제한한다. 이야기 사이마다 끼워드는 대신 가끔 짧은 한 장을 통해 한꺼번에 설명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다른 작가들이 보통 사용하는 방식으로.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만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재밌게 만든다. 키가 큰 해커 큐릭과 유리의 동생 마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을 통해 이 가까운 미래의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게 되고, 미로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만든다. 그리고 작가가 얼마나 과학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도 보여준다. 인상적인 것 둘을 꼽으라면 달리는 기차에서 공중으로 던진 공이 떨어지는 이야기와 마리의 투명인간 프로젝트다. 진보와 발전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죽음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과학과 철학을 이야기 속에 녹였다. 하지만 몇 가지 설정과 모호한 마무리 등이 여운보다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