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1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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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관성적으로 어떤 작가의 책이라면 관심을 두고, 사고, 읽는다. 물론 사거나 읽는 행위가 빠지는 경우도 있다. 좋아하는 작가라고 모두 읽지 못하는 것처럼 선호하는 정도가 약간 미흡한 작가라도 읽는 경우가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경우는 후자에 더 가깝다. <개미> 이후 계속해서 읽어온 그의 작품들은 늘 재밌거나 잘 읽혔다. 놀라운 가설과 상상력은 관찰력과 더불어 매혹적인 독서로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어느 작품은 취향과 달랐고, 그 상상력이 판타지 소설에 멈춘 듯한 느낌도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기대하고 읽는 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고양이. 그것도 암고양이다. 이름은 바스테트이다. 이 이름은 이집트의 고양이 모습을 한 여신에서 비롯했다. 바스테트는 보통의 암고양이인데 한 가지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종과 대화를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생쥐와 대화를 시도하려는 장면은 본능에 의해 가로 막히지만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른 종과의 상생과 대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고양이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대척점에 있는 수고양이가 피타고라스다. 이 피타고라스는 머리에 USB단자가 있어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다. 덕분에 인간의 지식을 습득한다.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정보에 기반한 사고를 한다. 바스테트에게 고양이와 인류의 역사를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보통의 고양이가 파리에서 벌어진 테러와 폭동으로 영적인 고양이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룬다. 고양이의 성장소설이란 평이 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암고양이의 시선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다보니 인간의 모습과 행동과 문화 등이 비판적으로 다루어진다. 특히 테러에 대해서 그렇다. 개와 고양이의 차이를 묘사한 장면들이 있는데 공감한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집사라고 부르는데 낯익은 명칭이다. 재미난 것은 노동을 바라보는 바스테트의 시점이다. 놀면서 본능적인 활동만 하는 고양이에게 시간을 내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피타고라스가 인류가 멸종되면 고양이들이 인간처럼 일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은 재밌는 대목이다.

 

테러가 점점 과격화되고, 내전처럼 벌어진 가까운 미래의 파리가 배경이다. 이 테러와 더불어 한 가지 문제가 더 생긴다. 바로 패스트다. 쥐들이 번식하면서 전염병이 확산된다. 1일 생활권으로 묶인 현대에 병의 전파는 더욱 빨라진다. 약탈은 일상화되고, 생존을 위해 개인들이 무장한다. 이 무장도 쥐들에 공격에는 무력하다. 한두 마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쥐와 고양이의 대결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양이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다. 압도적인 쥐의 숫자와 거대해진 몸집은 상식을 뒤집는다. 고양이들이 쥐를 피해 외곽으로 물러난 것도 이 때문이다.

 

고양이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고, 인간의 능력 같은 주다 보니 조금 어색한 부분도 생긴다. 설정에서 조금 무리가 있기도 한 피타고라스의 USB 머리나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모습 등은 살짝 거부감이 생긴다. 테러와 폭동 등으로 파괴된 파리에서 전기와 인터넷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대통령마저 쥐들을 피해 도망간 상태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마지막에 쥐들과 대결하고, 최후의 보루를 만드는 것도 인간이 아닌 고양이들이 진행하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아주 어색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흥미로운 장면들이 많은데 파리 외곽에서 피타고라스가 자신이 조사한 정보를 바탕으로 파리에 가야 한다고 연설하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그에 반대하는 다른 고양이들이 과거의 기억에 의해 바다의 물고기를 쉽게 잡아먹을 수 있다고 외치는 장면이다. 선지자와 그 반대의 모습인데 어딘가에 많이 본 장면이다. 쥐떼와 고양이와 인간의 연대가 전투를 펼치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빠른 번식이란 것과 날씨라는 변수 등은 미래를 쉽게 전망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바스테트가 영적으로 발전하는 장면은 <갈매지 조나단>이 연상되었다.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와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1권으로 충분한 분량인데 2권으로 나눈 것은 조금 심한 분권이다. 너무 많은 부분에서 자신의 철학과 교육 등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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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조 2019-02-16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제부터인가 관성적으로 어떤 작가의 책이라면 관심을 두고, 사고, 읽는다. 물론 사거나 읽는 행위가 빠지는 경우도 있다. 좋아하는 작가라고 모두 읽지 못하는 것처럼 선호하는 정도가 약간 미흡한 작가라도 읽는 경우가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경우는 후자에 더 가깝다. <개미> 이후 계속해서 읽어온 그의 작품들은 늘 재밌거나 잘 읽혔다. 놀라운 가설과 상상력은 관찰력과 더불어 매혹적인 독서로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어떤 작품은 취향과 달랐고, 그 상상력이 판타지 소설에 멈춘 듯한 느낌도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기대하고 읽는 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베르나르의 <고양이>는 보통의 고양이가 파리에서 벌어진 테러와 폭동으로 영적인 고양이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룬다. 고양이의 성장소설이란 평이 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암고양이의 시선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다보니 인간의 모습과 행동과 문화 등이 비판적으로 다루어진다. 특히 테러에 대해서 그렇다. 개와 고양이의 차이를 묘사한 장면들이 있는데 공감한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집사라고 부르는데 낯익은 명칭이다. 재미난 것은 노동을 바라보는 바스테트의 시점이다. 놀면서 본능적인 활동만 하는 고양이에게 시간을 내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피타고라스가 인류가 멸종되면 고양이들이 인간처럼 일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은 재밌는 대목이다.

다만 고양이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고, 인간의 능력은 엇비슷하게 주다 보니 조금 어색한 부분도 생긴다. 설정에서 조금 무리가 있기도 한 피타고라스의 USB 머리나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모습 등은 살짝 거부감이 생긴다. 테러와 폭동 등으로 파괴된 파리에서 전기와 인터넷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대통령마저 쥐들을 피해 도망간 상태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마지막에 쥐들과 대결하고, 최후의 보루를 만드는 것도 인간이 아닌 고양이들이 진행하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아주 어색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잘 읽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금 더 치밀한 구성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이희조 2019-02-16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행인님. 제가 임의로 기사 성격과 분량에 맞게 줄이고 마지막 문장만 추가해보았는데요, 혹시 이런 식으로 싣는 것이 문제가 없으시다면 진행하고 싶습니다. 거미(방구석힙스터) 와 같이 필명과 짧은 소개문구 하나 정도만 주시면 좋겠습니다.

행인01 2019-02-17 15:10   좋아요 0 | URL
필명은 특별히 없고 그냥 행인이나 행인01을 사용합니다.
그냥 책 모으는 것 좋아하고, 읽는 것 좋아하는 중년 직장인 정도로 해주시면 됩니다.

이희조 2019-02-18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알겠습니다. 잡지 받아보시길 원하시면 heejo@chaeg.co.kr 으로 주소 한 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