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 - 듣도 보도 못한 쁘띠 SF
이선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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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독특한 SF소설이 한 편 나왔다. 본격 전원 SF란 문구가 보이는데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전원일기>가 떠올랐다. 소설 속 드라마 <농사의 전설> 때문이다. 몇 사람의 이미지가 겹쳐 보이는데 작가의 노골적인 풍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풍자는 소설 끝까지 변함없이 유지된다. 한국 방송 프로그램을 패러디한 제목들이 곳곳에서 보이고, 캐릭터는 조금 바뀌어서 등장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설정 몇 가지는 기존에 SF소설하면 가졌던 과학지식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어떻게 보면 황당하지만 이 기이한 SF에서는 그렇게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게 된다.

 

장수 프로그램 <농사의 전설> 출연진들이 라비다 행성으로 납치된다. 라비다 행성에서 유행하는 지구 프로그램이 <농사의 전설>이다. 라비다 행성의 주식은 <소군>이란 식물과 동물의 결합물이다. 나무에서 자라다가 땅에 떨어져 움직이는데 이것을 벗겨 먹는다. 그런데 행성감기에 걸리면서 이 소군들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억지로 떨어트리면 설익는다. 라비다 행성의 농업사령관 띵이 이들을 데리고 온다. 소군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다. 방송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설정인데 우리의 일상에서 이런 허점을 노린 프로그램이 얼마나 많은가. 또 출연진은 띵의 등장을 몰래카메라 정도로 생각한다. 속는 척하는 행동을 하지만 진짜 납치되었다.

 

농사에 대해 무지한 연예인들이 라비다 행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먹을 것이라고는 통조림 밖에 없다. 농사 지식을 가진 인물이라고는 블루베리 농사짓는 것을 도운 조조조연 정도다. 그런데 이 행성에서는 지구의 아이돌 재이니가 아주 큰 인기을 얻는다. 노래도, 춤도, 연기도 되지 않는 그녀지만 라비다 행성 등에서는 초우주아이돌이다. 바뀐 환경과 문화가 한 사람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그녀의 팬클럽이 찾아와서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누고 돌아가는 일이 항상 있다. 재이니가 바란 것은 실제 아빠를 찾기 위해 연예계에 데뷔한 것이 전부인데 말이다.

 

조세열은 나이 오십이지만 얼굴 사기꾼으로 불릴 정도로 동안이다. 인기의 정점을 찍었지만 계속 하락세다. 이 소설에서 띵과 함께 주연으로 활약하는데 아주 큰 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다른 출연진의 분량도 어느 정도 유지하기 때문이다. 김수미를 연상시키는 출연진과 티격태격하는 장면들은 작은 에피소드를 만든다. 이들의 대화 속에 밝혀지는 삶의 이면은 연예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조세열에게는 숨겨진 과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딸 재이니다. 이들의 관계가 밖으로 드러나는 과정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상상력을 뛰어넘고 일상의 허점 속으로 파고든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만화적인 상상력이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놀라운 설정은 띵의 라비다 행성이다. 순수하고 느긋한 삶을 사는 이들인데 순간적인 판단 실수도 한다. 이 때문에 생긴 문제 중 하나가 행성감기다. 또 자기정화를 위해 오랫동안 떠나있는데 이 기간이 도대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행성감기 때문에 식량이 부족해지자 육체공유법이란 것을 만드는데 한 사람의 몸속에 세 명의 뇌를 넣는다. 물론 우리가 가진 것 같은 뇌의 용량과 모양은 아니다. 라비다인들은 세 번째 손이 있어 큰일을 볼 때 마사지를 해서 도움을 준다. 반가움을 표시하기 위해 세 손을 다 드는 경우도 있다.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소군>이고, 더 황당한 것은 우주선이다. 우리의 물리학 이론을 뛰어넘은 이 우주선은 자의식도 있고, 소재도 다양하다. 천으로 만든 우주선도 있는데 접어서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다. 이런 황당한 설정들에 불쾌함과 거부감이 강하지 않다면 이 블랙 풍자 코미디는 즐겁게 즐길 수 있다. 가끔 물리학의 세계를 벗어난 SF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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