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 떠나올 때 우리가 원했던 것
정은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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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카메라로 찍고, 만년필로 스케치하는 여행자의 글과 사진과 그림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히 만년필로 그린 그림이고, 다음은 사진이다. 마지막으로 한 자 한 자 천천히 읽게 되는 글은 잘 정제되어 있다. 이 정제된 글은 차분하고 깊은 사유가 담겨 있다. 가끔 그 당시의 흥분이나 기분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주 열정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이 책에서 여행안내서 같은 것을 기대했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적은 간단한 단상과 몇 장의 사진과 그림은 여행안내서보다 훨씬 강한 인상을 남기면서 우리를 유혹한다.

 

팟캐스트에서 그림이 여행을 좀더 세밀하게 보는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디지털카메라가 사진을 남발하면서 휙휙 스쳐지나가게 한다면 필름카메라는 셔트를 누르는데 좀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림은 그 풍경을 좀더 오랫동안 들여다보게 한다. 자신만의 그림으로 그린다고 해도 그 풍경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탄했던 부분도 바로 이런 디테일이다. 선 하나 하나와 전화번호까지 그려진 그 그림은 정말 강한 인상을 남긴다. 아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여행의 속도와 함께 관점도 이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한 장씩 넘기면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사진과 글과 그림은 재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다닌 수많은 나라와 도시들은 열정과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여행의 갈증을 지닌 나에게 ‘나는 언제나 가려나?’와 ‘가고 싶다’는 감정을 불러왔다. 이런 감정들은 언제나 여행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유럽과 미대륙과 아시아 등지를 돌아다닌 기록들이 한꺼번에 와 닿으면서 조금 더 늘었다. 특히 가까운 일본을 이렇게 디테일하게 들여다보았다는 것에서 이전에 읽은 에세이들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가까운 일본이라도 한 번 더 가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가 여행지에서 느낀 단상들은 정제된 문장으로 하나씩 풀려나온다. 화려하고 바쁘고 예쁘고 멋진 것만 추구하지 않고 느리고 게으른 것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여유가 있다. 자신이 여행자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즐길 때 그 여행은 좀더 여유가 생긴다. 여행자는 생활자와 다른 행동과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활자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속으로 들어가 시선과 속도를 맞춰야 한다. 이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찍고 그린 일본의 풍경은 낯설면서 동시에 낯익다. 낯선 것은 높이와 시야이고, 낯익은 것은 방송 등을 통해 본 그 장면이다.

 

책을 다 읽고 다시 대충 넘겨보면서 그 단상들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다른 책에서 읽은 것도 보이고,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말도 있지만 그가 느낀 여행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각 지역에 얽힌 간단한 에피소드도 나오고, 그가 발견한 소소한 장면들도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함께 나온 서울의 모습은 반갑고 낯익었다. 그의 작업실 풍경은 한때 나도 저런 공간을 가지고 싶어 했었던 모습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사진과 그림과 글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방송 출연을 둘러싼 에피소드는 웃음이 나오지만 방송작가들의 고된 일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아마 주변에 이 일을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곁에 있는 동반자의 존재는 읽는 내내 이 커플을 부러워하게 만들었다. 같은 감정과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 길고 많은 여행을 함께 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부러웠다. 그리고 해외여행만 다루고 있지 않아서 반가웠다. 아니 우리 주변을 둘러보고, 그곳을 기록할 때 내 삶이 여행의 한 부분임을 다시 깨닫는다. 정제된 문장 속에 담긴 수많은 사유와 이야기들은 한 번에 다 읽은 후 다시 넘겨보면 새롭게 다가오는 문장들이 꽤 많다. 결론을 말하면 글을 잘 쓴다. 그림도 잘 그린다. 여행도 많이 다녔다. 부럽다. 그래도 나의 삶은 또 다른 곳을 여행하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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