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시간을 쓸 수 있는 주말이라 신나서 다섯시반에 깼다. 어제 잠들기 전 그 정도로 설레지는 않았는데? 요즘 들어 특히 의식과 무의식이 따로 노는 기분이다. 목요일 밤은 오랜만에 악몽세트를 꿨는데 아마 Y샘 퇴사 때문일 거다. 무의식이 3분기가 걱정돼서 미칠듯이 요동쳤겠지. 의식세계에서는 생각보다 괜찮았는데. 지난주 월급인상 얘기를 하고 해결됐다고 생각한 다음날 Y샘이 한달 뒤 퇴사하기로 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Y샘 직전에 다녔던 T샘이 다음날부터 안 나올거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그날 밤 이석증이 왔다. 외출중이었는데 당장 눈앞이 캄캄하고 입맛이 소멸하는 게 느껴져서 집으로 바로 돌아갔었다. 이번 전화를 받았을 때는 놀랐지만 담담했고, 상황을 거리를 두고 판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올해 상반기에 내가 이만큼 자랐군! 하기도 했고, 지금 내 중요한 일들도 많고 바빠 이제 인사관리는 사장님이 신경써야지 할 수 있었고 분명 괜찮았는데. 아닌 모양. 일단 무의식이 주는 경고 같아 무리*무리로 계획한 주말은 포기해본다.
갑자기 할 일을 다 없애고 나니 아침부터 멍-했다. 오늘은 뭐하고 내일은 뭘할까 고민하다 순식간에 멍하기를 반복. 몸을 움직이려고 차타고 가야되는 맛집 D도서관에 다녀오기로. 집 근처 H도서관은 장서는 많은데 아무 책을 빌리러 가면 고를 수가 없다. 큐레이팅도 신간 코너도 언제나 내 취향과 다르다.
다음주 모임책 한권을 꼭 오늘 빌려야해서 갔다가 대출한도를 꽉 채워 고를 수 있었다. 다행히 상태는 괜찮은 것 같다. 맛이 갔을 때는 D도서관에 가도 빌리고 싶은 책이 없다. 읽고 안 읽고를 떠나서 빌리고 싶은 책마저도.
어디에 꽂혀있는지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지만 늘 책을 읽기 시작하는 타이밍에 찾아 헤매는 만화책. 맘에 들길 바라면서 우선 빌리고 본다.
생각보다 가만가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내가 항상 부족한 건 시간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창문을 여는 건 잘 하는데. 청소기부터 돌리는 게 힘든듯. 그냥 정신적으로 고요한 자리로 들어가는 게 더 쉽다.
중압감 그림이 너무 찰떡이었다! 중압감이 몸뚱아리에 끈덕지게 달라붙은 거랑 저 불안한 표정! 세상 철푸덕 앉아있는 모양도 그렇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참 대단해~ 나는 예전에 중압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30대를 살아보면서 아니라는 걸 늦게 알게 됐다. 그냥 20대까지는 진심으로 중압감을 느낄 정도로 잘해보고 싶은 일이나 나한테 중요하도 느끼는 일이 없었던 거였다. 실제로는 엄청 중압감을 느끼는 편 같다. 최근 가장 업데이트된 나는 다행히 짐의 크기는 언제나 그대로라는 걸 알고 있다.
표지 그림 때문에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부끄러워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마음먹고 기록했다는 서문. 나도 소소하고 하찮은 행복과 감사를 하루에 한 장면이라도 남기려고 노력중이다. 꽃잎만 모아보고자 하는 취지는 다르지만 매일 조금 기록한다는 점에서는 같지. '3장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터 봤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다. 노란색, 주황색으로 가득한 여름날에 보기는 약간 눅눅했던 챕터. 덮으면서 이 정도 워밍업이면 괜찮지. 또 너무 재밌는거 가져왔으면 글씨책까지 못 보지. 싶으면서도 내가 보고싶었던 만화는 뭐였을까? 싶다. 생각을 너무 많이 안 해도 되는데 멍하니 보다보면 슬그머니 영혼도 따뜻해지고 자 이제 나도 내 삶을 살러 다시 가자! 싶은거. 순순하게 귀엽고 재밌는거?
나는 주로 된일 위주로 기억하는 편이고 대부분 일의 결과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기보다는 신경쓰지 않는다. 는 대부분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서 그렇다.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일 때는 안된 일도 잘 기억하는 편이고, 일의 결과는 원하는 방향대로 맞추기 위해 무척 애쓴다. 만약 안 된 경우에는 이미 그 당시에 가능한 애란 애는 다 썼을 거라 그냥 어쩔 수 없지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한 게 나는 늘 난 되지 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새겨져 있었는데 최근 들여다보면 그게 좀 희미해져 있는 것 같다. 왜지? 이건 다시 시간을 들여 각인시켜야지.
만화책을 좀 보다가 점심에 지난 주에 갔던 식당에 갔다. 지난번에 음식을 받았을 때 빈 그릇이 있어서 이건 뭔가 싶었는데 돈가스 소스를 따르는 그릇이었다. 테이블에 돈가스 소스가 없었기도 하고, 머스타드, 와사비, 소금이 같이 나와서 몰랐네. 오늘도 모를 뻔 했는데 언니가 찾았다. 언니는 뉴스나 이슈거리를 매일 챙겨보는 편이다. 한국인이 이탈리아에서 파스타를 가위로 잘라먹다가 쫓겨났다는 얘기를 해서 반대로 한국에서 잘못 먹으면 식당에서 쫓겨날 수 있는 경우를 얘기했다. 김치를 씻어서 먹으면? 이건 한국인도 그런 경우가 있잖아. 간장게장을 시켜서 게장딱지를 안먹고 버리면? 이건.. 알려주긴 하는데 쫓아내진 않을듯. 비빔밥을 시켜서 안 비비고 밥이랑 반찬을 집어먹으면? 외국인들이 좀 그렇긴 하지. 쌈을 한 입에 안 먹고 끊어먹으면? 그러네. 한국인들은 굳이 한입에 욱여넣어서 먹긴 해. 아무리 그래도 쫓겨날만한 건 생각해내기 어려웠다. 새삼 올해 4월에 셰익스피어 읽기를 건너뛰었다는 깨달음. 여름에 생맥을 시켰는데 미지근하게 나오면? 아 이건 반대. 반대로 가게를 박차고 나갈 상황이지.
밥 먹고 들어와서 체력보충을 위해 책을 들고 침대로 갔다. 5시에 염색하러 가야되니까 그 전에 자고 일어나야된다. <환상통>에서 받은 충격은 연애소설과 연애실용서로 옮겨갔다. <환상통은> 100% 공감할수도, 100% 공감할 수 없기도 없어서. 책을 집어들기 전 외쳤던 덕질이 왜 사랑이 아니란 말이야! 는 슬그머니 입에 도로 쏙 들어가서. 원래 사랑은 연애는 무엇인가 싶어 연애소설에서 다른 사랑과 연애를 보고 싶어졌고, 내가 연애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있나 싶어 연애실용서를 보고 싶어졌다.
내가 뭘 보고 싶은건지 정확히 모르겠어서 아무튼 연애소설이 대략적으로 정리된 가이드북같은 게 필요했는데 예를 들면 00은 이루어지지 않는 짝사랑 소설, 00은 완전 다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내용, 대충 이런 것. 제목은 딱 내가 찾는 책 같았지만 별로 아니었다.. 그래도 작가들 글이 모인 책이라 읽기는 좋았다.
박준의 글에서 '그 남자는 인근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하던 여자의 애인이었다.'는 문장을 보고 몇번을 다시 읽는다. 여자를 군인으로 생각해서 앞뒤가 맞지 않음.. '문제는 혼자가 아니라 한 남자와 함께 나왔다는 것이다. 그 남자는 인근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하던 여자의 애인이었다. 외출을 나왔다가 부대로 복귀하지 않고 애인이 얻은 여관방에서 그도 역시 이십사일을 머무른 것이다.' 여자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서 여자를 군인으로 착각. 누가봐도 남자가 군인인데 멀쩡한 문장에서 왜 여자를 군인으로 만들었을까? 나는 확률이 희박한 경우의 수를 하나의 경우의 수로 봐주는 성향이 너무 강하다.
김보통이 쓴 <속 깊은 이성 친구>, 박준이 쓴 <상실의 시대>, 안은별이 쓴 <산시로>, 정세랑이 쓴 <제인 오스틴 북 클럽> 꼭지를 읽고 고민한다. 작가가 달라 스포가 제각각이다. 읽지 않은 책까지 읽을 것인가, 읽지 않은 책을 읽기 위해 에세이를 읽을 것인가.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읽기로.
작가들이 쓴 연애소설과 사랑 이야기는 각자 스타일로 좋아서 충격을 받는다. <속 깊은 이성친구>는 작가와 제목을 빼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서. <상실의 시대>는 세련되게 잘 써서. <산시로>는 이 책이 이런 책이었던가! 싶어서. <제인 오스틴 북 클럽>은 이게 책이랑 무슨 연관있는 내용인가 하다가 다정한 글에 쏙 빨려들어가서. 여러모로 다시 읽고 싶게 하는 매직핸드들.
정세랑의 글은 제목부터 사랑스러운데 '연애소설 애호가를 애호하는 이유'.
'연애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친절한 사람이다.' ... 연애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에 스스로를 아끼지 않고 이입하며, 쉽게 증오에 빠지지 않고, 공동체적이며, 약자를 배려하고, 문화상품에 온당한 대가를 치르길 주저하지 않고, 관심사가 다양하며, 삶을 즐기려는 건강함이 돋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동네의 조그만 낙서, 길가에서 만난 귀여운 동물들을 알아보고 예뻐하는 사람들이라서 연애소설도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 사랑스러운 것들을 알아보는 센서라 해야 할지 안테나라 해야 할지 하여튼 감각 수용체가 고도로 발달한 이 특별한 사람들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녀를 불문하고 참 세계에 이로운, 반할 만한 이들이었다. - 283p
오.. 맞는 것 같다. 나도 연애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자.
...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공계 남자랑 소개팅으로 만나 결혼해 버렸다. 독서가들끼리 서재를 합칠 때 그렇게 고생스럽다는데, 나는 그런 고민 없이 책꽂이를 독식할 수 있었다. -285p
이런 재밌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떻게 정세랑같은 사람이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결혼했을까? 싶어 신기했는데, 책장 이야기에는 납득이 간다. 이 부분에 대한 박준의 설명은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 그 수많은 다름을 견주어 보는 동시에 그 다름을 감내해 내야 한다는 점이 우리의 사랑을 아프게 만든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평소 자신에게조차 내색하지 않던 스스로의 속마음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대개 오랜 상처나 열등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사랑을 외롭게 한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면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당신의 외모와 성격과 목소리와 자라 온 환경과 어떤 것에 대해 품고 있는 마음이 나와 다르다는 점에서 사랑이 탄생한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 환경, 생각을 가진 사람만을 찾아 사랑이나 결혼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을 나는 긍정하지 않는다. - 182p
오.. 역시 이 책은 취지에는 맞지 않는데 잘 쓰는 사람들이 쓴 건 역시 좋아.
저녁까지 모임 발제문도 올려야 돼서 미용실에는 모임책을 가져갔다.
스스로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은 언제나 천하의 쓰임새가 기다리고 있는 법이니, 너무 좋은 것만 찾아주지 않아도 됩니다. - 125p [절제를 물려줘라]
찾아보니 일독 때도 밑줄을 그어뒀다.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본다. 어릴 때는 스스로 재밌어서 열심히 하는 것으로 행복하고 충만했다. 요즘은 내가 스스로 좋아서 열심히 한 것이지만 그것들이 그 과정 자체로 혹은 이후에 언젠가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면 좋지 생각한다. 어릴 때는 단순한게 좋고 복잡한 것은 굳이 싫어했다. 요즘은 기꺼이 복잡해지는 것이 가치있고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올린 발제는
책에서는 인생을 절제해서 운을 만들어가는 걸 중요하게 말하고, 그 중에서도 음식 절제를 몇번이나 강조해요. 저같은 경우는 식습관은 규칙적인 편인데, 가끔 육체적으로 무리한 날은 너무 힘들어서 과식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조화가 깨져서 뭔가를 채우기 위해 평소보다 더 먹었구나 하고 이해를 해주거든요. 정신적 허기가 과식으로 이어진거야 할 때도 있고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과로했을 때 먹게 되는 음식이나 식습관이 있는지 궁금해요. 먹고나면 나를 달래주는 음식이라던가 에너지를 한방에 쭉 올려주는 매직푸드라던가..?
저녁은 둥지냉면..! 실은 비빔면이랑 둥지냉면 면을 찬물로 헹굴 때마다 기후위기를 걱정한다. 나중에 물이 부족해져서 면을 찬물에 헹궈먹는 게 금지되는 법이 생기면 어쩌나 하고. 헹궈먹는 면에 사치세가 엄청 붙는다던가. 그러다 자유 둥지냉면 자유 비빔면 시대를 살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급 행복하게 호로록. 찌는 여름이 주는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