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자고 있다.
고요한 시간에 읽을 것인지 쓸 것인지 고민하는 건 결혼해서도 같은 점. 일기를 쓰고 싶었던 지 7번째만에 쓰는데 늘 '남편은 자고 있다'로 시작해서 중간에 남편이 깨면 흐름이 끊길까봐 쓰기 시작하기 싫었다. 이사하고 40일째가 되는 오늘은 남편은 중간에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어제 맛있는 빵집(재오픈함)에서 사온 맛있는 빵을 먹으면서 일기를 써볼까 했는데 맛이 없다. 재오픈하면서 빵이 맛이 없어진건지 아닌데 어제 사오면서 조금 뜯어서 먹었는데 맛있었는데. 싶어서 일단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감동란 하나를 빼서 먹는데 빵이 아니라 내 혀가 문제였다. 계란 맛이 제대로 나지 않고 맵고 까끄럽다. 어제 오아시스에서 받아둔 샌드위치 반절을 뜯어서 먹고 빨래를 돌려놓고 다시 컴퓨터로 온다. 세탁기나 식기세척기를 돌려놓고 뭔가를 할 때 만족스럽다. 어제 이사하고 처음으로 세탁기, 식세기를 돌려놓고 설거지를 하면서 내가 자동기계를 돌려놓고 동시에 뭔가 할 때 굉장히 흐뭇해하고 단정한 행복을 느낀다는 걸 깨달았다.
귤을 까먹는데 귤도 맵고 까끄럽다. 어제 처음으로 집에서 같이 고기를 구워먹었는데 파절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다. 파채를 물에 담궜다가 써야 했는데. 씻어서 그냥 바로 양념을 했더니 매워서 . 남편은 조금씩만 먹어서 괜찮았는데 나는 쌈을 쌀 때마다 듬뿍듬뿍 넣어 먹기 때문에 나만. 파절이 양념을 네이버에 검색해서 하는데 간장을 넣은 게 티가 안 나서 세번에 걸쳐 레시피의 3배 용량을 넣었다. 남편은 좀 싱겁게 먹는 편이라 파절이를 눈꼽만큼 넣어 쌈을 쌌다.
고기파티 준비해줘서 고마워
그럼 이제 한달에 한번씩 집에서 고기파티 할까?
한달에 한번만?
그럼 몇번 먹을까?
그때그때 내킬때 먹자
집앞에 마트는 고기 상태가 별로같았어 인터넷에 미리 시켜야되는데?
인터넷에 시킬때가 내키는 때지~
올해 3번째 이석증에서 회복중이다. 최근 들어 드물게 강도 8이었고 회복 속도는 빠른 편. 덕분에 일주일만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도 쓸 수 있다. 결혼과 이사로 신경 쓸 것도 많았지만 그 이전부터 쌓인 피로와 해소할 시간을 갖지 않은 것에 화룡점정으로 직장에서 두명이나 동시에 바뀌면서 긴장한 탓이다. 남편을 만나고 세번째인데 남편 덕분에 회복이 빠르다고 느낀다. 의지가 되어서 혼자일 때보다 위로와 안정을 받아서라고 생각하고 있다. 용케 만나고 6개월동안 이석증이 없었는데 아마 중간에 왔다면 관계에 집중하지 못했을 거고 그럼 아마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다.
책상위 독서대에는 이번주 모임책 그래도 가야 할 길 구판이 올려져 있다. 인증샷이 올라왔던 것처럼 30쪽을 지나고 있는데 단전에서부터 만족감이 올라오는 책이다. 상품 등록을 하다보니 또 헷갈렸는데 다시 가야 할 길. 그래도 가야 할 길. 진짜 제목은 아직도 가야 할 길. 아직도 헷갈린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전체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 영적으로 정신적인 성장은 오직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20p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석증이 오면 2주간은 직장만 다녀오고 모든 시계를 멈춰놓는데. 오늘은 하나씩 직면하는 날이다.
남편은 아직 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