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밖은 사정없이 비가 내리는 중이다. 점심에 인스턴트 쇼유라멘을 끓여먹고 차 한잔을 우려 앉았다. 차는 Taylor’s of harrogatelapsangsouchong 티백을 골랐다. 역시 비오는 날에는 훈연향과 나무향나는 랍상소우총이기도 하고, 상미기한이 다가오기도 해서. 중국의 정산소종을 서양 브랜드에서 만든거라 찻잎이 가진 훈연향은 아니고 흉내내어 입힌 훈연향이긴 하지만, 그래서 향이 강해 좋아한다. 작년만 해도 이 타이어태운 연기내가 나는 차를 내돈주고 사서 직접 우려 마실 거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하긴 작년만해도 비오는 날이면 가게에서 잔치국수에 소주 한병쯤 마시고 일어나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좀 사서 집에 들어올때에나 컴퓨터 앞에 앉았을 것이다. 나같은 사람도 변하긴 변한다.


 요며칠 장마기간이긴 했지만 비가 오다말다 하기도 했고, 집이나 사무실이나 차나 우산이 한 개쯤 있으니까 빈손으로 다녔다. 그런데 차에 우산이 없었던 것이다! 우산이 없다는 걸 깨닫는 건 언제나 우산이 꼭 필요할 때다. 요즘 경험하는 바로는 틀림없다. 책을 가장 읽고 싶을 때는 바로 책을 읽을 수 없을 때다. 책을 가장 읽기 싫을 때는 바로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을때다. 암튼 그렇다. 아침에 집을 나올 때는 괜찮았지만 중간부터 비가 오더니 도착하니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교복처럼 메고 다니는 크로스백 가방과 <다시, 책으로>가 들어있는 약간 빳빳하고 약간 코팅이 된 에코백을 가져가야 했다. 그때였다. 그때 나는 내가 어릴 적 꿈꾸던 내 모습 중 일부분으로 성장했다는 걸 알았다


 세상물정에 밝은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랑 대학 다니던 시절 커피 마시며 했던 얘기가 떠올라서다. “명품가방 진짠지 아닌지 구분하는 법 알아?”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당시 나는 가방을 보고 그게 명품가방 브랜드의 디자인인 것도 몰랐으니 진짠지 가짠지 알 수도 없고, 알아보고 싶은 욕구마저도 없었다. “비올 때 머리위에 가방을 들고 뛰면 가짜고, 가방을 안고 뛰면 진짜래ㅋㅋㅋㅋㅋㅋㅋㅋㅋ우리는 그때 그 얘기를 하며 같이 신나게 웃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아까 웃자고 한 얘기긴 하지만 아무리 급비가 쏟아지고 우산 살 곳이 없어도 가방을 안고 뛰는 존재는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에코백에 들어있는 책은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서도 표지가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책 은 종이책과 디지털 매체로 읽을 때 작동하는 뇌 회로가 다르니 앞으로의 세대들이 두 가지 방식으로 유연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해줘야한다는 내용이다. 그 중 단어 하나를 볼 때 뇌에서 일어나는 부분을 자세히 설명한 게 좋았는데, 그 중 촉감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처음에 책을 받았을 때부터 약간 뭐 묻히면 내가 너무 싫을 것 같고 애지중지하고 싶은 표지라고 생각했는데, 촉감 부분이 나오면서 더 그런 마음이 강해진 상태였다. 표지 소재 고른 사람 오구오구 기특해~~ 하고 있었는데? 그런 책이 에코백 속에 있는데? 우산이 없고, 비는 쏟아지는 것이다. 다시 한번 에코백은 약간 두께감이 있고 약간은 코팅처리가 되있었다는 걸 말하고 싶다.



 나는 뛰었다. 한손으로는 머리위에 손우산을 하고, 한손으로는 에코백을 둘둘 말아 가슴에 품고. 사람인자 모양으로 최선을 다해 뛴 덕분으로 책은 다행히 무사했고, 머리카락과 티셔츠는 조금 젖었다. 열심히 뛰었기 때문에 호흡이 조금은 가빴고, 약간 가쁜 호흡은 어쩐지 인생에 대한 만족감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이제야 일기를 쓰다보니 생각난 건데 메고있던 크로스백이 별로 비싼 것도 아니었는데. 요즘 영화를 좀 보긴했다. 주성치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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