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뜻이 아니라서 처형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테레자에게 양해를 구하려는 듯 그의 목소리는 친절했다. 이 친절함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나무껍질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 P248
여기 오면서 그녀를 따라다녔던 불안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책에서 은밀한 동지애의 징후를 보았다. 이런 책꽂이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녀에게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 P254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미래로도망친다. 그들은 시간의 축 위에 선이 하나 있고 그 너머에는 현재의 고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테레자는 자기 앞에 이 선이 있다고 보지않았다. 뒤돌아보는 시선만이 그녀에게 위안이 될 뿐이었다. - P274
그녀는 다시 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한히 슬퍼졌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색깔을 거느리며 사라지는 인생에 대한 작별. - P285
그리고 그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몰랐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결백한가에 있다.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P292
"난 몰랐어! 그렇다고 믿었어."라는 바로 그 말 속에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닐까? - P292
그들은 토마시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이상한 미소를 그에게 지어 보였다. 은밀한 공범자끼리 나누는 어정쩡한웃음 그것은 창녀촌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남자가 지을만한 웃음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조금은 부끄러워하지만 동시에 그 부끄러움이 피장파장이라는 점 때문에 즐거워한다.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연대감 같은 것이 형성된다. - P299
어떤 사람들은 비굴함의 인플레이션이 그들 자신의 행동도 평범한 것으로 만들며 그 실추된명예를 돌려주기 때문에 즐거워했다. - P301
혹시 그 결정 뒤에는 보다 심오한 무엇, 자기 자신의 이성적 사고로도 포착되지 않는 그 무엇이 숨어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 P320
토마시는 정치범은 구할 수 없었지만 테레자는 행복하게 해 줄 수있었다. - P359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것보다 생매장당한 까마귀를 꺼내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요." - P359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나의 자아가 끝난다.)에 매혹을 느낀다. - P361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뿐이다. 토마시의 인생처럼 그 역시 두 번째 수정 기회 없이 어느 날 완료될 것이다. - P363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 만큼이나 가벼운, 참을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것이다. - P364
예전에 동료들이 그가 비겁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경멸했을 때, 그들은 모두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를 더 이상 경멸할 수 없고 심지어 존경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지금, 그들은 토마시를 피하는 것이다. - P380
그는 휴가를 가고 싶었다. 모든 명령, 모든 "es muss sein!"과 결별하는 완벽한 휴가를. - P382
저주와 특권, 행운과 불운, 사람들은 이런 대립이 얼마나 서로 교체 가능한지를, 인간 존재에 있어서 양극단 간의 폭이 얼마나 좁은지를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는 없었다. - P398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의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 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자체가 될것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것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천칭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 P398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 P400
행진 대열이 내건 묵시적 슬로건은 "공산주의 만세!"가 아니라 "인생 만세!"였다. 공산주의 정치의 힘과 모략은 이 슬로건을 독점하는 데 있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철저히 무관심한 사람들조차도 공산주의 행렬로 내모는 것은 바로 이 멍청한 동어반복("인생 만세!")이었다. - P407
사비나가 테레자에게 자기 그림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드러난다. - P417
사람들이 그녀의 삶을 가지고 만들어 내려고 했던 키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처절히 노력해야만 했다. - P418
그리고 그다음도 또 계속될 것이다. 잊히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 P461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나는 나란히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 이들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행진을 계속하는 길로부터 벗어나있다. - P479
그녀가 한 말은 슬펐지만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그들은 행복했다. 그들이 행복한 것은 슬픔을 무릅써서가 아니라 슬픔 덕분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고, 두 사람 눈앞에는 똑같은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들이지나온 십 년의 삶을 몸으로 구현하는 절름발이 개. - P484
그러자 테레자는 속삭였다. "두려워하지 마, 두려워하지 마. 거기에서는 아프지 않을 거야. 그곳에서는 다람쥐와 산토끼 꿈을 꿀 테고, 암소들도 있고, 메피스토도 있을 거야. 두려워하지 마…..…" - P498
춤을 추면서 그녀는 토마시에게 말했다.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온 것은 나 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이 바로 나야." - P515
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자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 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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