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읽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 >
첫번째 산문 <글솜씨>가 내게는 첫 버지나 울프와의 만남이다. 이 전까진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 대단한 그녀라는 건 당연시 되는 분위기라, 그녀의 정신세계에 동참하는 게 쉽지 않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너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어렵다는 사실로도 무언가 매력적이다. 계속 읽어봐야겠다.
두번째 산문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도 연이어 난해하고 어려웠다. 버지니아 울프가 본인 마음 속을 마구 꺼냈는데 심리학을 모르는 내가 그걸 학술적으로 정리해야하는 느낌이랄까. 이 느낌은 어쩐지 책 마지막까지 갈 것 같다. 그럼에도! 마지막 이런 꿈이 있다며 심판의 날에 작가가 기대하는 마지막을 보고, 어렵든 목적이 있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우리가 책읽기를 즐거워 하는 사람이라는 공감에 마음이 한없이 풀어지고 채워졌다. 그 마지막 구절이 난해함을 덮고 계속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을 읽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세번째 산문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은 내가 버지니아 울프와 공감하기엔 기본이 사실 안 된 상태였다.
제인에어는 어릴적 간략한 본만 읽었고 폭풍의 언덕은 명작?답게 줄거리만 알고있다. 나온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더라면 현재 산문이 다르게 다가왔을텐데 아쉬웠다. 아쉬움은 꼭 읽어보리란 다짐으로 대체해야지!
네번째 산문 <여성의 직업>을 읽으며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역차별이란 말도 나오지만 여성을 포함해, 소수자들은 동일하지 않은 선에서 출발하고, 더 발악해야 그나마 따라갈 수 있다. ‘라떼이즈홀스‘라 내키지 않지만, 내가 처음 사회생활할때도 그랬다. 지금은 정말 많은 부분이 바뀌었지만 더 후배들에게는 나아짐이 있어야겠지. 그리고 그런 과정들을 보며 보상심리를 느끼지 말아야지. 정말 힘들었던 순간들이 많았었다. 굳이 라떼이즈홀스를 한건 나의 과시나 그 비슷한 꼰대마인드는 아니다. 나 역시 1920~30년대 여성들부터 시작하여, 남성 여성 선배들과 동료, 다른 조직의 배우고 싶은 누군가들의 부단한 노력과 아픔의 결과에서 시작했을테니. 그게 라떼이즈홀스의 이유다. 나는 그 시대의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에서 위안을 얻었고, 나도 그랬다고 공감한다는 그런 표현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들을 위해 공감해주고 위로해주고 더 나아진 환경을 주어야지. (사실은, 나도 지금도 여전히 힘들다. 안그런척할 뿐.) 모자르고 이기적인 나이지만, 여성을 포함한 어떤 약자인 남성에게도, 남녀가 아닌 그냥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어야지. 나는 연대의 힘을 믿는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나는 선택적 연대를 하고있다...)
다섯번째 산문 <여성과 소설>을 읽으며 여성이 쓰는 소설과 우리들의 삶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엔 여성이었지만 지금은 범위를 넓혀야 겠다. 지금도 그런 부분이 없는건 아니지만, 여성만이 아닌 소수자, 그리고 약자라고 칭하겠다.(대부분이 소수가 될 순 없어도, 대부분 어떤 의미에서 약자다.) 그리고 그냥 소수자나약자가 아닌, 연대하는 우리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고자 두려워도 한발씩 내딛는 사람들의 삶이라 하고 싶다.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렵지만 한걸음씩 내딛어 누군가의 특권이었던 부분도 긴밀히 협업과 충돌을 하기도 하고, 그 후엔 그 조차도 넘어 우리 운명과 삶을 당당하게 돌볼 수 있기를.
여섯번째 산문 <여자는 울어야 할 뿐> 은 역시나 어렵고, 심지어 앞선 산문들보다 분량이 많아 조금 더 읽기 힘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차곡차곡 이해되진 않았다. 그러나 읽기 전 제목부터 작가의 마음에는 공감이 되었다. 그 시대에 여성으로서 전쟁과 기타 문제에 할 수 있는것이 당연히 어려웠겠지 하는 거리감 있는 관찰자의 막연한 생각을, ‘여자는 울어야 할 뿐‘ 이라는 표현으로 지금 나의 이야기로 잡아끌어 왔다. 지금 시대는 그 시대와 견주긴 어렵겠지만 여전한 유리천장 상황도, 오히려 여성의 노력하지 않는 무능함도 아이러니하게 동시에 존재한다. 우는 척 하며 아무것도 안하거나, 울어야만 하는 상황이 싫었다. 그렇다고 능력이 있던것도 아니었다.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고, 개념도 능력도 없어서 할 수 있는걸 하면서 버틸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세월들이 쌓여 여전히 모자르지만 예전보다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이제는 조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프고 나니 너무 절박하게 살은 것도 꼭 좋은게 아니었구나 하는 약간의 깨달음도 생겼다.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 사실 울고만 싶을 때도 많지만, 울고만 있지 않게 해준 많은 이들의 각고의 노력과 헌신을 감사드릴 수 있던 산문이라 감히 남겨본다.
일곱번째 산문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 >을 읽으며 나 또한 소설이든 드라마든 만화든 인물에 중점을 두는 편이라 괜히 반가웠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건 버지니아의 표현처럼 단 하루에도 수천가지 생각과 감정이 충돌할 수 있는데, 왜 소설이나 다른 매체에선 전형적인 타입으로만 나누었을까 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버지니아가 이를 설명한 단어와 표현이 너무 좋았다. 복잡,혼란,수천 가지 감정, 더없이 무질서한 상태, 만남, 충돌, 사라짐.
여덟번 째 산문 <현대 소설>을 읽으면서, 평소 소설을 읽다보면 난해하거나 어려울수도 있는데, 그게 그냥 나에게 적합했던 것만 읽었는데, 이제는 드디어 (!) 완전한 타인의 마음을 만났구나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너무 익숙한 플롯에 익숙해졌구나, 그런데 수만가지 다른 모습이 평범한 우리들 삶의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역시나 어려워 재독이 필요한 산문이었지만, 그냥 좀 편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홉번 째 산문 <수필의 쇠퇴>를 읽으며, 저자가 말한 수필의 기본적인 덕목이 진정성이란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그 진정성이 함부로 판단이 안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그렇다면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흥미롭지도 않고 유용하지도 않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소심한 반론을 남긴다. 아, 물론 내게도 흥미롭지도 유용하지도 않은 수필과 다른 글들이 많다. 그러나 그 이유는 진정성은 모르겠고, 그냥 말 그대로 흥미도 유용도 없어서다. 사실을 더 늘여놓자면 어쩐지 버지니아 울프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교수님 같아 변명을 미리 해두어야 할 것 같은 넋두리다.
열번 째 산문 <웃음의 가치>에 따르면 웃음이 희극과 비극의 균형감각을 유지해준다니,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어 흥미롭게 읽어갔다. 어느 순간 찡그리는 표정과 근육이 잠들기전 풀리지 않기 시작하고 오랜 시간동안 그래왔다. 최근에 방법을 찾았다. 찡그림을 푸는 게 아니라 미소를 지으면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혼자 있을때면 숙제처럼 미소를 지어보려고 연습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좋고 재미있는 일이 있을때면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는데, 혼자선 얼굴이 굳어있는게 쓸데없는 지나친 진지함이었나 보다.
열한번 째 산문 <런던의 부두>를 읽으며 반복적인 생계의 현장을 본다. 앞 선 산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으며, 혹시 내가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고자 하는 걸 감도 못잡은건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열두번 째 산문 <런던 거리 쏘다니기>를 읽으며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서 그냥 길을 걷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열세번 째 산문 <지난날의 소묘>가 이 책의 마지막 글이란게 너무나 어울려 보인다. 때로는 지니로, 때로는 버지니아 울프로 어린 시절의 눈높이와 지금의 눈높이를 오가나, 이 둘의 눈높이가 그리 다르지는 않아 보였다. 계속 어렵다 어렵다 거리가 있었는데, 마지막 이 산문이 결코 쉽지 않은데도 친한 언니, 혹은 어른스런 친구의 회고록을 낭독으로 듣는 느낌이었다. 타인들이 버지니아 울프라고 할 때, 지니의 마음도 본 것 같은 느낌. 때로는 약하고 때로는 강했던, 유리 같지만 강철 같았던 지니의 지난 날과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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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는 전쟁이 늘 삶을 위협하던 20세기전반기를 살면서 역사적으로 사고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사고하는 일을 위해 울프가 당대 사람들에게 권한 것은 바로 폭넓은 독서였다.
7p (엮은이의 말)
가령 우리가 지하철을 타고 간다 쳐요. 플랫폼에서서 열차를 기다리는 우리 앞에는 환하게 밝힌 현판이 걸려 있고 거기엔 ˝러셀광장 행˝ (Passing Russell Square)이라는 말이 적혀있습니다. 우리는 눈앞의 그 글자를 속으로 되뇌죠. 다음 열차가 러셀광장으로 간다는 그 유용한 사실을 마음에 각인시키려고요. 플랫폼에서 서성이며 ˝러셀광장 행, 러셀광장 행˝이라고반복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글자들이 서로 뒤섞이고 바뀌어 어느새 이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거예요. ˝사라진다. 세상은 그렇게 말한다. 사라지는구나… 이파리는 시들어 떨어지고 무겁게 드리운 물기는 땅으로 뚝 떨어지고 만다.
인간은 오고..˝
24p (글솜씨)
passing‘ 이라는 단어에서 일종의 자유연상처럼 다른 시구들이 떠오르는
‘사라진다, 세상은 그렇게 말한다‘ (passing away saith the world)는 크리스티제티의 시 제목이고 ‘이파리는 시들어 떨어지고‘ (leaves decay and fall)는 테니시 「티토누스(Tithonus)」에 나오는 나무는 썩어 쓰러지고‘ (woods decay and에서 연상된 것이다. (이하 이 책의 모든 주석은 옮긴이의 것이다.)
25p (글솜씨)
그림이 괜찮다 싶으면 별 하나를 달아요. 아주 좋으면 별 두 개. 그리고 자기 생각에 탁월한 천재성을보이는 작품이다 싶으면 검은 별 세 개가 반짝거려요. 그러면끝이죠. 한 줌의 별과 단검으로 예술비평 전체, 문학비평 전체가 6페니 동전짜리가 되는 거죠.
27p (글솜씨)
물론 어휘를 모아서 알파벳순으로 분류해서 사전에 실을 수는 있지요. 하지만 말은 사전 속에 사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정신 속에서 살지요. 그 증거를 원한다면, 감정이 북받칠 때 그것을 표현할 말을 아무리 해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세요.
33p (글솜씨)
사실 책에 어떤 법칙을 정할 수 있겠어요? 워털루 전쟁은 확실히 특정한 날에 일어났죠. 하지만 『햄릿』은 『리어왕』보다 나은 작품일까요? 누구도 단정해서 말할 수 없고, 각자 나름대로정해야 할 일입니다.
39p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이 잡다한 혼돈에질서를 부여해 우리가 읽는 책에서 정말 폭넓고 깊은 즐거움을얻을 수 있을까요?
40p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위대한 소설가, 그 위대한 예술가가 제공하는 것을 전부 활용하려면 대단히 섬세한 직관력을 지녀야할뿐더러 아주 담대한 상상력도 필요해요.
43p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런 분위기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바로 시이고, 우리 스스로도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때가 바로 시를 읽을 때이기도 합니다.
49p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적어도 내게는 이런 꿈이 있어요. 심판의 날이 와서 위대한 정복자와 법률가와정치가 들이 왕관이나 월계관을 쓰고 불멸의 대리석 위에 선명하게 그 이름이 새겨지는 보상을 받을 때, 옆구리에 책을 끼고다가오는 우리를 보고 신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꿈이죠. ˝보게나, 저들에게는 달리 보상이 필요 없어. 우리가 여기서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네, 책 읽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
60p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것은 등장인물 캐서린 언쇼의 그 뜻이 명확하지 않은 이런 말에서 솟구쳐 오른다. ˝모든 것이 다 죽어 없어지고 그 혼자남는다 해도, 난 계속 살아가겠지. 하지만 모든 것이 다 그대로인데 그 혼자 사라진다면 우주 전체가 낯설고 거대한 존재가 될거야. 나와 전혀 상관없는.˝
70p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
그렇지만 여전히 두 사람은 영국소설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성들이다. 마치 지금까지 인간을분별하는 기준으로 알고 있던 것을 갈가리 찢어버리고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그 빈 공간을 현실성을 초월하는 삶의 광풍으로 채워 넣은 것만 같다.
72p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아주 다릅니다. 여전히 싸워야 할유령이 많고 극복해야 할 편견도 많아요. 사실 여성들이 자꾸달려드는 유령을 베어버리지 않고도, 난데없이 날아오는 돌에맞지 않고도 가만히 자리에 앉아 글을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할 거라고 봅니다. 게다가 어떤 직업보다여성에게 가장 열려 있다는 문학에서 상황이 이러하니, 여러분들이 이제 처음으로 진입하려고 하는 여러 새로운 직업의 경우엔 어떻겠어요?
84p (여성의 직업)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었지만 방 안은 아직 휑뎅그렁해요. 가구를들여놓고 장식을 해야 하지요. 누군가와 함께 쓸 수도 있고요.
여러분은 그 방에 어떤 가구를 들여놓고 어떤 장식을 하려 하나요? 누구와 어떤 조건에서 함께 쓸 생각인가요? 이것이야말로극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여러분은 이제 그러한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역사상 처음으로 여러분은 그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어요.
85p (여성의 직업)
국가를 향한 쇠파리 잔소리꾼의 역할은 지금까지 남성만의특권이었는데 이제 여성도 그 일을 하게 되었다고 기대할 법도하다. 여성의 소설도 사회의 악과 그 개선책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남녀 인물도 오직 정서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여러 집단과 사회계층과 인종 속에서 긴밀히 협업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하는 관계로 등장할 것이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변화다.
101p (여성과 소설)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관계를넘어 시인들이 붙들고 씨름하는 더 폭넓은 질문, 우리의 운명과삶의 의미라는 문제로 관심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101p (여성과 소설)
지나친 재물이 바람직하지 않고 지나친 가난도 바람직하지않다면, 그 둘 사이에 바람직한 어떤 중간이 있다는 주장이충분히 가능하죠. 그렇다면 그 중간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살아가려면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까요? 그리고 그 돈은어떻게 지출해야 할까요? 결국 제게 1기니를 받아낸다면 어떤 종류의 삶, 어떤 종류의 인간을 목표로 삼겠습니까?
129p (여자는 울어야 할 뿐)
이 열차는 리치먼드에서 워털루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국문학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기차입니다. 왜냐하면 브라운 부인은 영원하기 때문이에요.
163p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
밤에 잠자리에 들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감점에 당혹스럽기도 할 겁니다. 단 하루에도 수천 가지 생각이머릿속을 지나가고 수천 가지 감정이 더없이 무질서한 상태에서 서로 만나고 충돌하다가는 사라지죠. 그런데도 여러분들은작가들이 그 모든 것을 뜻밖의 놀라운 환영과 전혀 닮은 구석이없는 모습으로 만들어 브라운 부인의 어떤 상(像)이라고 내놓으며 팔아넘기는 일을 용납합니다.
175p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
그 안을 잘 들여다보면 삶은 ‘이런 식‘과는 딴판으로 보인다. 평범한 날, 평범한 사람의 마음을 잠깐 살펴보자. 그 마음은 수만 가지 인상을 받아들인다. 사소한 인상, 놀라운 인상, 순간적인 인상, 강철에 새기듯이 뚜렷한 인상, 수많은 원자가 한없이쏟아져 내리듯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그렇게 쏟아져 내릴 때,
그렇게 월요일이나 화요일의 삶의 면모를 이룰 때, 그 강조점은예전과는 다르다. 중요한 순간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있다.
187~188p (현대 소설)
삶이란 대칭을 이루며 놓인 마차의 불빛이 아니다.
삶은 빛을 발산하는 후광이자, 의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감싸는 반투명의 봉투다. 아무리 상궤를 벗어나고 복잡해보일지라도 이렇게 순간순간 변하는, 가둬지지 않는 미지의 정신을 가능한 한 이질적이거나 외적인 요소를 섞지 않고 전달하는 것이 소설가의 임무가 아닐까? 단지 용기와 진지함이 요구된다는 뜻이 아니다. 소설에 적절한 재료는 우리가 관습에 비추어 믿는 바와는 조금 다르다는 말이다.
188p (현대 소설)
모든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에게서 우리는 성인의자질을 알아본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그들을 향한 사랑, 영혼의 가장 가혹한 요구에 값하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려는노력이 성인의 자질을 이룬다면 말이다.
193p (현대 소설)
소설의 적합한 내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195p (현대 소설)
그래서 세상에 나오는 것은 다들 마땅히 기대하는 진솔한 진실이 아니라 수필의 형식을 빌려 소심하게 곁눈질하는 글일뿐이다. 게다가 대부분이 진정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을 결여하고 있다.
203~204p (수필의 쇠퇴)
과거에는 희극이 인간 본성의 결함을 재현하고 비극이 실제보다 위대한 모습의 인간을 그려낸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을진실하게 그려내려면 희극과 비극의 중간쯤 위치를 잡아야 할테고, 그 결과물은 희극이라기엔 너무 진지하고 비극이라기엔 너무 불완전한 어떤 것이 될 듯하다.
207p (웃음의 가치)
웃음이란 우리 안에 존재하는 희극적인 정신의 표현이고 희극적인 정신은 널리 알려진 방식에서 벗어나는 특이하고 별난면과 관련이 있다. 왜 그러는 건지, 언제 그러는 건지도 모르게부지불식간에 난데없이 터지는 웃음은 그 정신이 내보이는 일종의 견해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살펴본다면, 그러니까 이 희극적 정신에서 받는 인상을 분석한다면, 겉보기에 희극적인 것이 근본적으로는 비극적이라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으면서도눈에 눈물이 어린다는 사실을 분명 알게 될 것이다. 번연이 말했던 이것은 해학의 정의로 받아들여져왔다.
209p (웃음의 가치)
웃음은 무엇보다 우리의 균형감각을 유지해준다. 우리 모두그저 인간일 뿐임을, 누구도 전적으로 대단한 영웅이거나 전적으로 악한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210p (웃음의 가치)
실제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서도 최악의 실수는 균형감각의 부족에서 생겨난다. 지나친 진지함은 삶과 예술 모두에서 나타나는 최근의 경향이다.
212p (웃음의 가치)
우리 자신의 삶이 바뀌지 않는 다음에야 규칙적인 부두의일과에 변화가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225p (런던의 부두)
또한 저녁 시간에는 어둠과 불빛의도움으로 무모한 일도 한번 벌여볼 수 있다. 우리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날 좋은 저녁 네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집을 나선다. 지인들이 아는 나의 자아를 훌훌 벗어던지고 익명의 뚜벅이들이 이루는 공화적 무리에 합류한다.
230p (런던 거리 쏘다니기 )
서점을 둘러보며 그렇게 우리는 무명의 존재들, 사라진 손재들과 변덕스럽게 갑작스러운 우정을 쌓게 된다.
243p (런던 거리 쏘다니기)
따라서 내방식을 찾느라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시작하려 한다. 내방식이 저절로 생겨나리라 확신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상관없다.
256p (지난날의 소묘)
그렇다면 미래에는 버튼을 누르면 내가 원하는 대로 기억을 꺼내볼 수 있는 장치를발명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게 과거란 뒤로 길게 뻗은 대로다. 장면과 정서의 기다란 띠, 그 대로의 맨 끝에 여전히 정원과 보육실이 있다. 여기서 장면 하나, 저기서 소리 하나를 기억해내지 말고, 벽 적당한 곳에 플러그를 꽂고 과거에 귀를 기울여봐야겠다.
262p (지난날의 소묘)
충격을 수용하는 그런 능력이 나를 작가로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272p (지난날의 소묘)
검은 바탕에 찍힌 푸른색과 보라색의 커다란 얼룩만을 구분하던 아기를, 13년 후 1895년 5월 5일 (오늘로 딱 44년이 되었다)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느꼈던 그 모든감정을 느낄 수 있는 아이로 탈바꿈시키는 삶의 기운이란 얼마나 대단한 걸까.
275p (지난날의 소묘)
나는 오히려 슬퍼 보였다. 어머니는 뒤편에 늘 자신만의 슬픔을가지고 있었고 혼자 있을 때 마음 놓고 슬픔에 젖어들었다.
281p (지난날의 소묘)
차분하면서도 슬펐고, 어떤 최후의 느낌이 찾아들었다. 아름답고 푸르른 봄날 아침이었고 무척 고요했다. 그런날이면 모든 것이 끝났다는 그 느낌이 다시 내게 찾아든다.
285p (지난날의 소묘)
아버지는 왜 여자가 필요했을까? 철학자로서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이다. 실패했다는 그 사실이 아버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자신의 신조나 행동거지에 따르면, 그러니까 공적인 관계에서 아버지가 취했던 기준에 따르면 자신에게 칭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다. 그래서 프레드 메이트런드와 허버트 피셔 앞에서는 오로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었고, 자기 자신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사람인 양 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서 칭찬을 받아낼 때는 정말 염치도 없고 무자비하고 탐욕스러웠다.
292p (지난날의 소묘)
말하자면 우리는 1910년에 살고 있는데 그들은 1860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295p (지난날의 소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