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이를 만나기 전의 삶이라는 것이 가난하게만 느껴졌다.
- P15

‘짓궂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줄곧 생각해왔다고 이는 이경에게 말했다.
"비열한 말이라고 생각해 용인해주는 거야. 그런 말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거야.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다니.."
- P18

이경은 수이가 언제나 하루를 최대치로 살아낸다고 생각했다. 
- P23

 마치 자기는 과거나 현재와 무관한 사람이라는 듯이 성인이 되면, 대학에 가면 벌어질 미래의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는 사 년 뒤의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그것도 한치의 의심 없이 기다려온 미래에 배반당한 적 있는 수이가.
- P25

은지는 가만히 서서 이경을 바라봤다. 더이상 차갑지 않은 바람이불었다. 바람에 은지의 짧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날렸다. 당신도 알고나도 알고 있어 걷는 것 말고는 하는 일도 없지만 그저 같이 있어서 좋다는 것을. 어딜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헤어지기 싫어서 이러고 있다는 것을. 
- P40

쌀쌀한 밤, 이불이라도 덮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주희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윤희의 마음에 작은 빛을 드리웠다.
- P102

나는 자신이 겪은 일을 자기 말로 풀어 쓸 수 있는그애의 능력과 끝까지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태도에 마음이 갔다. 
- P106

그애가 애써왔다는 걸 알아서인지도 모른다. 애쓰고 애쓰고 또 애써온 시간이 그애의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나도 그애를 대할 때는 불성실하고 싶지 않았다. 무성의하게 공무가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
- P115

모래는 고개를 저었다.
"난 공무만큼 널 생각해."
모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 말을 했다. 잡티도 별로 없는 깨끗한 얼굴에 그만큼이나 깨끗한 표정이 어렸다. 어떤 망설임도 불안도 없는 얼굴 내가 가질 수 없는 얼굴.
- P118

갈등을 어물쩍 넘기는 화해가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그들에게 화가 났다. 감정싸움에 섞인 서로에 대한 애정이 제삼자인 내게도 배서, 그 애정이 나를 우리의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는 것 같아서, 다른의 맥락을 둘만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 P122

스물하나의 나에게 이 년이라는 시간은 내가 살아온 시간의 십 분의 일이었고 성인이 되고 난 이후의 시간과도 같은 양이었다. 나의 선택으로 공무를 만났고, 일상을 나눴고, 내 마음이 무슨 물렁한 반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씩 떼어 그애에게 전했으니 공무는 나의 일부를 지닌 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무와 떨어져 있는 나는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식의 애착이 스물하나의 나에게는 무겁게 느껴졌다.
- P131

그때 나는 공무와 포옹하고 싶었다. 만약 내 옆에 모래가 있었더라도 나는 똑같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애를 껴안아 책의 귀퉁이를 접듯이 시간의 한 부분을 접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펴볼 수 있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그러나 스물둘의 나는 공무를 포옹하지 않았다. 
- P158

"그렇게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돌아서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모래가 말했다. "우리의 모든 대화가 그저 예전의 모방이었다는 기분이."
"모래야"
"그저 예전의 우리를 흉내내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열심히 공무도 알았겠지."
- P159

물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변형될 뿐, 산화되어 재만 남는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물질은 아주 작은 부분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한다. 그 과학적 사실은 어린 나에게 세상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다정하게 다가왔었다.
- P162

그날 모래의 말과 눈물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닫게 됐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 P180

나는 무정하고 차갑고 방어적인 방법으로 모래를 사랑했고, 운이 좋게도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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