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하루만 나한테 시간을 줘. 그러고도 안 된다면, 내가 물러설게, 깨끗하게 놓아줄 테니까."
경민의 마지막 제안이 타당하게 느껴졌으므로, 한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68p

어두운 한아의 표정에도 경민은 반가웠고, 북받쳐올랐고, 사랑을 확신했다. 등을 곧게 폈다.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78p

말이 잠시 끊긴다. 비어 있는 침묵이 아니라 불편하게 꽉찬 침묵이 흐른다. 젤리 같은 공기, 아주 맛없는 젤리 같은 공기를 못 견디고 경민이 다시 입을 연다.
81p

"바보 같다고 생각 안 해. 한 번도 너 바보 같다고 생각한적 없어. 넌 같은 자리에 있는 걸 지키고 싶어하는 거잖아.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소중하게 생각하지않는 것들을 난 너처럼 저탄소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81p

"그래도 누구랑 이야기를 하니까 덜 미친 이론인 것 같고안심되네요."
국가 공무원이 비슷한 의심으로 같은 장소에 와 있다는것이 상당히 마음의 위로가 되는 주영이었다.
88p

한아는 경민의, 아니 경민이라 생각해왔던 이의 설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동시에 모두 이해했다.
94p

"나는 안 될까. 처음부터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았어.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 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고려해달라는 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내바람을 말하는 거야. 필요한 만큼 생각해봐도 좋아. 기다릴게. 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95p

그 무서움의 도치가 더 무서웠다.
99p

지구에서도 아주 좁은 면적을. 우주가 얼마나 넓은데 그건 너무 이상한 일이었어.
101p

나는 너의 그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 너는우주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너는너무 멀리 있는데, 나는 왜 널 가깝게 느낄까. 내가 네 옆에있는 바보 인간보다 더 가까울 거라고, 그런데 그걸 넌 모르니까, 전혀 모르니까, 도저히 잠들 수 없었어. 꿈을 꿀 수 없었고.
102p

궁상 맞은 연기를 하는 외계인을 보니 짜증이 났다.
107p

"괜찮아요. 얘기 들어요. 경민아, 너도 입에 불 빼라."
"하지만..
경민은 망설였다.
"반지 뺀다?"
"알았어."
114p

네가 없으면 내 여행은 의미가 없어져.
1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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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는 시각에 편중된 편이라 음악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폴로의 대표곡들과 대표곡이 아닌 곡들을좋아했다. 어느 쪽이냐면 대표곡이 아닌 노래들이 더 좋다고 여기면서, 사운드를 산뜻하고 화려하게 쓰는데도 어딘지본질적인 느낌이 나는 곡들이었다. 척추로 색채감을 느끼게하는 음악을 쓴달까, 그렇게 말하면 아무도 이해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가사가 정말 좋았다. 좋은 음악가인데다 세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27p

그래도 괜찮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지 않아도, 정말 괜찮았다. 이쪽에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빙글빙글, 그를 가운데두고 궤도를 돌 수 있다면.
29p

"고마워요. 오늘 그런 말을 듣는 게 정말 필요했어요."
그날 아폴로가 건넨 피크는 모서리가 형편없이 닳아가고 있지만, 주영의 마음은 닳지 않았다. 
31p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조금 익숙해져볼까 하고 이것저것 찾아봤어요. 재밌더라고요, 인터넷."
"어디에 익숙해진다는 거야?"
"그냥……. 여기에."
32p

"한아를 위해서라면, 우주를 횡단할 만큼 전 확신이 있어요"
33p

주영이 아폴로를 발견하고 나서 가장 자주 들은 말이었다.
그 말을 정말이지 다채로운 톤으로 들어왔다. 영하 40도의무시, 영상 23도의 염려, 70도의 흐느낌 , 112도의 분노로.
36p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 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끊임없이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세계에, 예수와 부처의 세계에,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세계에, 테슬라와 에디슨의 세계에,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세계에, 비틀스와 퀸의 세계에,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세계에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되어 처절히 벤다이어그램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말이다.
37p

평소에는 거의 해체했다 다시 잇다시피 혁신적인 변화를주기도 하는 한아지만, 애도하는 손님들이 찾아오면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려고 노력한다. 아주 살짝만 새로움을 더한 다. 그 새로움이 슬픔을 조금 지울 수 있을 정도로만.
38p

할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했 아까 어쩐지 안아주고 싶더라. 부적절할 것 같아서 관뒀지 만 포옹이 자연스러운 문화권이라면 안아줬을 텐데."
40p

 다행히 모두 흔쾌히 응해주었다. 아티스트의 실종에 연관된 것이 그들에겐 일종의 흥미진진한 이벤트인 듯 보였다.
나도 그냥 이벤트였으면 좋겠어. 이렇게 모든 중심을 다 내어주지 않아도 되는, 잠깐의 이벤트면 좋을 텐데, 서늘한 안쪽을 숨기며 주영은 생각했다.
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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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순 엄마, 정태화 아빠께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일 거예요.

좋게 말하면 아주 사적인 데가 있는 가게였고, 나쁘게 마하면 시대착오적이라 할 만큼 생산성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12p

잔잔하게 이어질 줄 알았던 행복이, 배수구로 빠져나가듯흔적을 감춘 것은 최근이었다. 
13p

"뭐, 나도 남들이 보면 답답하게 신다 싶을 거고, 애초에개의 그런 점이 좋았는걸 난 모험가 타입이 아니라 늘 익숙한 곳에 있으려 하니까 경민이가 내 몫까지 모험을 해주는거 같아서 갤 보며 대리 만족을 할 때도 있고…… 그렇게서로 보완해주며 사는 거지, 뭘 "
19p

하얀 캔버스화에 꽃잎을 떨구기 시작하는 친구를 물끄러미 보았다. 호흡속도까지 신경을 쓰며 집중한 옆모습에 혼자 감탄하고 말았 다. 그런 모습에 처음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리는 언제나 한아의 편이었다. 
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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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면 기사 제목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16세 소녀,
주현절 케이크 때문에 부모와 절친한 친구를 식칼로 살해.
122p

"거 참 이상하네요. 엄마는 크리스타가 있는 자리에서크리스타 얘기를 할 때는 크리스타라고 하면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 얘기를 할 때는 ‘개‘ 라고 하는군요."
"너, 정말 문제 있다."
머리를 가로저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123p

편견의 안개, 이 답답함! 사람볼 줄 모를때 나도 이러나..

부모님에게 진실을 알리려는 순간 나는 부끄러웠다. 이일에서 내가 한 역할이 고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그런 역할을 기꺼이 떠맡은 것은 크리스타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모든 거짓말이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아니다) 우리 가족을 파괴하려는 그녀의 욕망에 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42p

불행이 가져다준 좋은 점도 있었다. 나의 방과 책 읽을권리를 되찾은 것이다. 이 시기만큼 책을 열심히 읽은 적이 없었다. 과거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앞으로 다가올 위기 상황에 맞서기 위해서도 나는 탐욕스레책을 읽었다. 책읽기를 도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책읽기란 가장 정신집중이된 상태에서 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묘하게도 그것이언제나 흐리멍텅한 상태로 현실에 뒤섞여 있는 것보다 덜두렵다.
167p

 박해받고, 고통받는자는 결코 ‘망각‘ 될 수 없지 않겠는가? 따라서 나를 집요하게 박해하는 적이야말로 ‘망각‘ 으로부터, 죽은 삶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주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아멜리 노통브에게 적이 없는 삶이란 권태요. 무의미와 동의어이며, 그래서 그는 적과 화해 없는 공존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적과 화해한다면 더 이상 적이 될 수 없지 않은가? 더이상 적이 없다면, 또 다른 적을 찾아야 한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사랑의 파괴』)작가의 내면 깊은 곳에서 집요하게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적‘ 의 존재. 그에게는 "이세상에서 없어서 안 될 것" 이 바로 이 ‘적‘ 인 것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새 작품을 출산해내는 그다.
을 가을에는 또 어떤 형태의 적을 만나게 될지 궁금하다.
2004년 여름 끝 무렵 백선희

184p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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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활이 그랬다. 세상을 향해 나를 열어야지 했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5p
-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중에서

나는 방금 전의 설문조사에서 그녀가 10점을 따냈다는 걸 알았다.
31p
-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중에서

아니다, 그렇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크리스타는 나를 본 것이 아니었다. 내 문제를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고 있었다.
  52p
-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중에서

엄마가 다가가서 크리스타를 안았다. 크리스타는 코를 찡긋하며 기뻐했다. 아버지도 환하게 웃었다. 
나만 고아였다
59p
-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중에서

여기저기 책들만 쌓여 있었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말해주었다.
63p
-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중에서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사회면의 신문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16세 소녀가 부모와 친구를 살해했으나 살해 이유를 한사코 밝히지 않고 있다.〉 
84p
-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중에서

〈16세 소녀가 절친한 친구를 살해한 뒤, 그 사체를 요리해서 먹여 부모를 독살했다.〉
85p
-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중에서

지금의 나만 예외였다. 크리스타가 어느 날 내게 드러내 보여준 비밀은 오직 나에게만 주어진 권리였다. 앙테크리스타의 얼굴 말이다. 그것은 나를 대수롭잖게 여기기에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랑 둘만 있을 때 그녀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전혀 다른 얼굴이 되었다. 
87p

그녀의 영혼 속에는 크리스타에서 앙테크리스타로 바뀌게 해주는 스위치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스위치에는 중간 위치가 없었다. 온(on) 상태의 그녀와 오프(off)상태의 그녀 사이에 공통분모는 있는지 궁금했다.
89p

아르셰는, 다리가 미치는 거리를 보폭이라 하듯,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말한다. 이 말만큼 나를 꿈꾸게 하는 말도 없다. 이 말에는 끊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시위가 당겨진 활과 화살, 그리고 무엇보다, 시위가 당겨지는 숭고한 순간, 쏘아진 화살이 솟구쳐 날아가는 순간, 무한을 향한 지향, 그리고 활의 욕망이 제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화살이 날아갈 수 있는 거리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의연한 실패,
한참 날다 멈춰버리는 활기찬 추진력 등이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아르셰는 멋진 비약이요,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를 내포하고 있으며, 한순간에 불타버리는 순수한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93p

나는 크리스테(christée)‘ 라는 말을 지어냈다. 크리스타의 사정권, 크리스테는 크리스타의 독이 미치는 반경을 의미했다. 크리스테는 몇 아르셰만큼이나 방대했다.
크리스테보다 훨씬 넓은 개념도 있다. 앙테크리스테다.
그것은 내가 일주일에 닷새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저주스런 반경, 지수함수의 원주다.
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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