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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다큐 여행 - 국어교사 한상우의
한상우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베끼고 싶은 문장. 낮은 포복으로 쓰기.
책을 놓는 순간 문장에 대한 고민이 시작됩니다. 기호에 뜻을 닮을 때 나는 어떤 방식을 써왔는가 말입니다. 저는 유려한 문체의 구분법을 잘 모릅니다. 책에, 뜻에 가장 알맞은 보폭이 한낱 기호들을 춤추게 할 뿐이라고, 가장 합리적인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연애편지는 구태스럽고 촌스럽고, 표절로 가득할수록 보편적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용증명은 차갑게 거세되고 유리하게 단절되야 합니다. 에세이는 촉촉하거나 건조하거나 마르거나 퉁퉁한 생각이 글자를 유유히 흘러가야 합니다. 어떤 삼류소설들은 전혀 낯설지 않은 것들의 익숙한 조합으로 치정을 사랑으로 둔갑시킵니다. 어떤 여시인의 목소리는 기합처럼 단단하고 또 어떤 중견 소설가의 목소리는 머그컵처럼 자주 입술을 대고 싶습니다. 트롯의 문장은 저대로의 문법이 있고, 변주의 범위는 넓지 않습니다. 동시는 예쁘지 않을 때 더욱 예쁘고 어떤 오류에도 너그러워 집니다. 글에 가장 어울린다면 그 문장이야말로 가장 빛나리라 확신합니다. 이런 제게 문장력을 떼어 말할 때, 문장에 대해 탄복하는 상황은 많지 않습니다.
서툴게 립스틱을 바른 여중생의 입술만 불거져나오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칭찬할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문장이 저혼자 잘난척을 하면 그 기세에 눌려 귀를 틀어막고 싶기도 합니다. 물론 그만한 문장에 그만한 내공을 심은 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만요.
여기, 문장력을 자랑하는 한 국어교사가 있군요. 그는 그 유려한 글씨로 길위의 이정표를 다시 씁니다. 그의 이정표는 온통 글씨로 된 그림입니다. 그에겐 도무지 직설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비유에 지난 며칠 밤을 농락 당하고 맙니다. 이 징후가 젊음의 혼잡스러움이라는 걸, 이전에 읽었던 김용택의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맞추다>를 통해 바라봅니다. 김용택은 원래도 화려한 수사법을 자랑하는 시인은 아니었습니다. 담담하게 아릿한 맛을 전했던 그의 옛날 시들로 그득히 배를 채우고 디저트처럼 읽은 책이었습니다.
시인은 난폭하다시피 시감을 잘라내고 충직한 직언을 일삼았습니다. 여느 누가 내뱉었음 지루하다못해 자리를 털었을 잔소리들을 띄엄띄엄 내놓았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연륜이 쌓이면 사람이 해야할 일은 어쩌면 이런 것일수도 있겠구나'하고 말이죠. 드리블로 상대를 제치고 시도한 현란한 백덩크에 공이 백 보드에 슬쩍 닿고 림 위를 한 바퀴 굴러 간신히 2점을 내기보단, 순식간에 수비에서 공격자로 무리를 따돌리고, 가지런히 모은 발과 신중히 고른 자세로 시원스런 3점슛을 얻는 전략이 전혀 위험하지 않은 나이가 되면 말입니다.
국어교사 한상우의 <자전거 다큐 여행>은 '비유'라는 과정이 젊음의 전유물처럼 싱싱하게 다가왔습니다. 알고보면 조금은 늙은 이 80년생 조차도 비유 속에서 젊음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시인 김경주는 '길의 감식가'라는 또 다른 비유의 옷을 선사 하였고, 그의 감식반에는 몸둥이와 자전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몸으로 현장을 들락거리며 좌절과 실패와 소외와 치욕과 고통의 피해자들 편에 서서 진술합니다. 저는 어느 쪽에 속해 있는 줄도 모른채 열렬한 박수를 칩니다. 피해자는 못 될지언정 영광스런 자도 아님을 확인합니다.
주체와 객체가 자연스럽게 전도된 그의 글쓰기는, 낮은 자세로 말미암은 높은 문장법으로 이득을 얻습니다. 알뜰하고 가여우며, 사랑하는 동시에 눈을 부릅뜨려는 그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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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명낙가사에 당도함으로써 7번 국도가 구비한 오르막의 오랜 시달림에서 겨우 풀려난 자전거는 등명낙가사의 톡 쏘는 약수로 수분을 보충했다. 철광석을 통째로 갈아 넣었는지, 약수는 낯선 광물의 맛으로 삼켜졌다.-p70 에서
역사는 이긴 자의 필체로 쓰여진다. 잔혹하고 비정한 이 문장을 우리는 어떻게든 수긍해야 할 것인데, 나는 싫은 사람과 악수하는 기분이다. 궁녀 삼천 명을 절벽으로 밀어낸 건, 의자왕의 향락이 아니라 시 지으며 놀던 조선 문인의 과장된 수사법이었다. -p79 에서
전국 각지의 꽃들이 개화 전에양귀비를 찾아와 요염을 배워 가면 곱절은 더 예뻐지리라. ..복어회를 떠낸 듯 얇은 꽃잎은 반투명하여 오래 들여다보기 민망하였는데, 그 야릿한 꽃잎을 연분홍으로 물들여 입은 치맛자락은 양귀비의 몸 쪽은 하얗고 세상 쪽은 붉었다. ..한가로운 바람이 슬쩍 양귀비를 건드리면, 치맛자락은 모르는 척 뒤집어졌다. -p112에서
사진; "어머니, 참 크지요?"/"그래, 크다 커~"/은진미륵은 슬쩍 발을 곧추세웁니다. -충남 논산 관촉사
바라보는 사물들의 그림자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 저는 그가 꾹꾹 눌러쓴 글씨에 갖혀 버립니다. 그의 문장들은 남모를 긴장감으로 사람을 조여옵니다. 소박한 자전거 여행이 고속열차만큼 팽팽하고 바퀴살에 튕기는 돌멩이가 광개토대왕처럼 땅따먹기를 잘 합니다. 무른듯한 사람의 신통력을 떠올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