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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谷신神불不사死
곡신은 영원히 죽지 않으니
이를 일러 현묘한 모성이라고 한다.(시위현빈)
현묘한 모성의 문을 일러(현빈지문)
천지의 뿌리라고 한다.(시위천지근)
그것은 이어지고 이어져 영원히 존재하며(면면약존)
아무리 써도 무궁무진하다.(용지불근)
-<도설천하 노자> 제6장에서
현빈, 즉 현묘한 여성은 천지만물을 낳고 기르는 모체.
현빈의 문은 생식기의 입구.
그렇다면 나대로 그림을 그려본다.
깊은 골짜기는
헤아리기 어려운 어머니
그 자궁의 문을 열면
그곳에 뿌리가 있고
그것은 이어지고 이어져
끝이 없다.
평석의 핵심은 이렇다.
그것은 텅 비어 아득하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영원히 고갈되지 않으며, 또한 영원히 운행을 멈추지 않는다.
해설의 핵심은 이렇다.
신비하여 이름짓기 어려운 도를 여성의 생식기로 비유하면서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고 만물을 생육하는 도의 특징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도설천하 노자>는 노자의 도덕경 원문과 함께 해석, 평석, 해설을 차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도'가 만물의 근원임을 설명하면서 노자가 빌려온 비유가 이렇듯 혁신적이었다. 해설에선 사람의 생식기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가 흔했던 프로이트의 말도 슬쩍 들려준다. "자궁은 첫 번째 집이다. 인류는 자궁을 그리워한다. 무엇보다 그곳이 안전하고 편안하기 때문이다." 문명의 편의를 누리고도 안락함을 얻지 못해 돌아가고픈 곳이 '구멍'이라는,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은 노자의 무위자연에 대한 곁가지 해석처럼 들린다.
<도설천하 노자>를 읊는 동안 간간히, 노자의 도덕경에 달아놓은 현대의 주석들이 떠올랐다. 말하자면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투일른지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노자보다 늦게 태어난게 애석할 밖에. 여기 김언희의 시 한편을 이어붙여 본다.
늙은 창녀의 노래 1
활씬 벗었어
배때기꺼정 열어젖혀 놓았어
닭전 골목 평상 위
관능의 닭살 오소소 돋아오른
갓 마흔 나의 누드
헤벌어진 배때기 속에
마늘 대신 쑥 대신 당신
당신을 집어넣고
통째 우겨넣고
끓는 기름의 고요
속으로 투신하고 싶어
자그르르
튀겨지고 싶어, 쉴새없이
가로젓던 대가릴랑
토막쳐 버렸어, 이리 와
당신, 이리 와
배때기째 벌려지는, 이
허기 속으로
-첫시집 <트렁크>에서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바라보는 여시인의 펜에서 나온 시로써는 노자의 솔직하고 질박한 비유 이상으로 과격하다. 어디까지나 언어의 소리만 들었을 때 그렇다. 놀랍게도(나만 놀라운가?) 언어에는 마음도 담을 수 있고 색깔이나 모양도 담을 수 있다. 언어의 소리를 음탕하게 엿듣는 것만으로도 나쁘진 않지만, 저 해부된 창녀의 배때기 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더더욱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관습적인 지식에 염증을 느꼈던 노자가 '도'를 환기시킨 방법과 어찌 유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한 노자가 말한 '도道'란 경經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물과 통하는 것인데, 어떻게 저 벌려진 배때기만이 추하다고 여길 수 있을까. 저 허기 속에 마늘이나 쑥만 집어넣어야, 희생과 대가를 치러야만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건 누구인가.(이건 분명 관습적인 지식이다. 시인이 느낀 염증에 공감해본다.)
창녀의 벌거벗은 몸 속으로 대가리를 쳐내고 들어가는 이가 반대로 희생양인양 느껴진다. 그러나 <늙은 창녀의 노래1>이 공격적인 어투를 무기로 뭔가를 다치게하고 있다는 생각은 금새 사그라든다. 오히려 강하게 회유하면서 일체시키는 듯 하다. '이리 와 당신, 이리와'라고 불현듯 따뜻한 음성으로 잡아끄는 그 구멍이 잉태와 산고가 함께했던 면면 의 영역임을 다시금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