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부터 시작할까. 이번 주 따끈한 신간을 모두 잡아먹은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부터 시작해야할까. 아니면 '머릿 속에 달랑 삽 한자루'(진중권) 들어있는 정권의 수장이 후퇴시킨 민주주의를 먼저 불러볼까. 그것도 아니면 민주정권이라고 믿어마지 않은 지난 10년간의 두 대통령이 실은 노동자와 불편한 관계였다는 비판부터 해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제 막 노동자들의 절규에 귀를 연 내 미천함부터 폭로해야할까.
분명한 건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가 뭐라도 하지 않고는 못배기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논객들이 모여 '민주주의'를 말할 땐 이건 분명히 고매한 민주주의, 이념의 우리 속에 갖힌 민주주의, 의당 그래야만 하는 민주주의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말하자면 역사속의 민주주의 재조명으로 불을 붙이겠다는 '객'들의 '논'일 뿐, 나(主)의 고민(惱)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시' 민주주의다. 민주공화국의 고객이 외치는 민주주의 리콜에 사주는 왜 변함없이 돈얘기만 꺼내는가. 그럼 그는 고객의 입을 막을만한 별다른 재주라도 있는가. 이 아줌마에게도 모종삽 한자루 쥐어주고 도시 미관에 애쓴 공로로 급여봉투라도 나눠주겠는가. 민주주의가 밥은 못먹여 주었기 때문에 CEO 대통령이라는 희한한 직함으로 탄생한 그는 딱, 노동자를 탄압한 자본의 횡포대로, 딱 재벌총수만큼의 위력으로 국민을 머슴삼아 휘두르고 있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로 노동운동의 메뉴얼을 만든 골리앗전사 이갑용에 의하면 짐승처럼 일했던 현대중공업의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처우개선보다 두발자유화를 가장 강력히 원했다. 개인의 존엄성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경제 강국도, 공평 무사도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특별히 싸우길 좋아하는 투쟁자들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며 남편이며 동료다. 그들의 민주적 권리찾기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실제로 한홍구 교수(<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 끝나자마자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들며 민주화가 돼서 살림살이가 좋아졌다고 주장한다. 그 석 달 동안 일어난 3000여 건의 파업은 임금을 인상시켰고, 내수 시장을 원활하게했고, 구매력을 높이고, 나아가 평균수명까지도 늘렸다고 말이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역시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어떻게 분배의 정의를 이뤄냈고, 사회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말한다.
작업 환경이나 근로조건을 향상시키려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경제 파탄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덧씌우는, 자본의 노동자 길들이기(<길은 복잡하지 않다>)는 노동 탄압을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역치로 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노동 운동을 그들만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경제 대통령을 자칭하면서 언론과 공권력을 이용해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삼키는 것이 국가의 사익에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이라면 현대중공업의 노동자들이 원했던 '두발 자유화'를 떠올려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냐,고 묻는 사람들은 그래도 낳다. 이리저리 계산해보고 밥 안먹여준다는 선택을 한 것이니, 민주주의가 만날 올라오는 밥상의 밥그릇에 남은 밥떼기처럼 당연했던 80년생 나의 삶은, 부끄럽게도, 단 한번도 민주주의를 목놓아 부른적이 없다. 선거권이 주어지고 나의 첫 대통령이 김대중, 다음이 노무현 이었으니 설사 그들이 '좌측 깜빡이를 켠 우회전'(<리얼진보>)이라해도 분명 나의 20대 민주주의는 반공만큼도 거론되지 않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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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는'시점에 곧장 도달할 수 있는 질문 '나는 지금 투표말고 뭘 할 수 있을까'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전혀 민주적이지 못했던 지난 몇 개월간의 독서에 성토하면 이번 주 닥치는 대로 책을 펼쳤다. <소수의견><이웃집 김형탁><길은 복잡하지 않다>. 무슨 냄새가 나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게 맞다. <소수의견>의 껍데기를 벗기면 책은 붉은 색을 드러낸다. 두 건의 살인을 소재로 하고 있는 만큼 주택가에 번진 핏물을 연상하는게 적당하겠지만, 투쟁하는 철거민 아들의 죽음이 경찰병력에 의해서냐 철거용역업체의 깡패에 의해서냐 하는 법정싸움이라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 투쟁하는 '노동자'에게 붉은 색 딱지를 붙인건 민주화 열사들이 탄생한 학생운동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니 어쩌면 분단 이후 반공교육부터 이념 정치공세가 먹히는 여태의 현재 진행형으로도 말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현실은 이데올로기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효과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이데올로기에 의해 부인하는 것이다. (루이 알튀세,<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정치>, <소수의견>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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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도정일,박원순 외/휴머니스트/2010.5
소수의견/손아람/들녁/2010.4
소수의견
<소수의견>은 잘게 나뉜 '공소시효''사실관계''재정신청'등의 소제목과 함께 각종 법관련 도서의 인용문으로 시작된다. 허공에 글씨를 쓰는 것만큼 허무한 일인 '이데올로기' 덧씌우기가 어떤 효력이 있는지 읽어낼 수 있다. 이 붉은 색 딱지는 진짜 붉은 사람에게 붙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싸우기 시작하면 대뜸 시작되는게 이 색깔판명이다. 말하자면 사익으로만 똘똘뭉친 집단은 언제든 이데올로기 공세를 정당화할 준비가 되어있다. 민생살림의 사무국장도 그들을 위해 싸워 준 변호사를 내치며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지난10년간 관료주의에 맞서 싸워왔죠. 하지만 인정하겠습니다. 그게 우리 안의 관료주의를 극복했다는 뜻은 결코 아닌 걸 저도 압니다. ..
소설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간 민주 노총에 대해 솔직히 비판한다.
불온서적들의 계보라도 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같은 필독서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손사래를 쳐도 '용산참사'를 오버랩 시킬 수밖에 없는 <소수의견>이 사회적 문제를 대두시킨 문학사의 흐름속에서 짚어볼 수 있겠지만 짐작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런게 아니라도 <소수의견>은 한눈에 딱딱한 제목과 '사건은 대한민국 법률 빛 학설과 판례를 따른다'로 문을 열면서 '재밌게' 읽으리란 기대는 접어둬야했다. 하지만 거창하고 과잉된 법문들을 뒤로 법정 드라마의 말초적인 재미라는 의외의 소득을 준다.
<사랑과 전쟁>이나 <죄와 벌>같은 법정 드라마의 공방은 유무죄의 법정의 정의보다 증거와 증인, 정황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법정 자체가 소설의 모티브, 행간, 구조들을 닮아서 재밌다. 이해의 한계력을 가지고 완성된 소설 한권을 쓰는 법정은 익숙하다. 결국 이 소설을 붙잡고 한 번도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사건이나 주제의 무게와는 별개로 이 소설은 지나치게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완벽한 허구이지만 우리의 공동기억은 <소수의견>을 지난 용산 참사와 당연한 듯 오버랩시킨다. 절대 용산은 아니지만 모두 한국의 용산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니 그런 혐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소설이다. 소수의견, 소수자에 대한 물음도 승리도 과정도 모두 극적인 장치에 불과할 지 모르겠지만 교묘하게 현실과 겹칠 때 소수자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분노하게 되고, 승리에 대한 갈망을 만들어낸다.
그 주역은 언제나 약한 자의 편에 서서 인권과 법을 저울질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한 열혈 변호사의 행보는 아니었다. 어쩌면 우연히, 그리고 자신의 이익과도 결부하여 만족스러운 해피엔딩을 이끌어낸 영광스런 주인공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선택은 언제든 옳다는 일차적인 해석을 내릴 수도 있지만, 주인공이 지도를 읽고 목적지를 향해가는 똘똘한 항해사라기보다는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여행자였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한 발자국'이 만들어낸 행동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 할 때는 생각하지 마라'고 했던 데카르트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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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김형탁/인터뷰, 엮음 서미현/레디앙/2010.2
길은 복잡하지 않다/이갑용/철수와영희/2009.12
연이어 만난 두 명 의 진짜 행동가들은 이웃집 김형탁과 골리앗전사 이용갑이다. 노동운동으로 다진 그들의 뚝심은 서로 다른 길을 향해 간다.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노조위원장, 지역활동가로 꿈을 뿌리내린 김형탁은 이웃집에 있고, 노동자 이용갑은 전사라는 칭호답게 노조위원장, 민주노총위원장, 지방단체자치장으로 노동자의 꿈이라는 나무에 꽃을 틔운다.
이웃집 김형탁
노동운동가를 이웃집에 둔 또다른 이웃이 인터뷰하고 엮은 <이웃집 김형탁>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지역운동, 생태운동 등의 이력을 담백하게 맛볼 수 있다.
<다시, 민주주의다>의 한 명의 논객 김찬호는 '마을'을 말한다. 삶의 결이 느껴지는, 서로의 삶을 해석해주는 '의미 창조의 공간'으로 마을을 드는 것이다. 그가 민주주의와 직접 결부하여 말하진 않았지만 대의민주주의의 부작용으로 접속이 끊어진 자리에 골목길을 이어붙이고 빨래터같은 거점 공간을 만든다면?
근래, 마을에 토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 가장 작은 공동체이면서 큰 목소리가 될수도 있는 '마을'에 대해 되뇌는 중이었다. 투표권을 행사하고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고독한 삶으로 돌아와 세상 돌아가기를 방관하고 보니, CEO 대통령, 녹색 성장이란 웃지 못할 신생 단어조합을 들어야했다. 반대한다면 견제하거나, 소통을 원한다면 손 내밀 수 있는 곳이 나의 이웃, 즉 동네여야 한다는 생각을 향한다. 어느 정의로운 활동가의 삶이 그저그런 동네에 머물렀을 때, 노동 전사 이갑용이 구청장이 되었을 때보다 반가웠다.
김형탁의 공이 실은, 책으로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 민주적 노선을 훑기에도 결과는 썩 내세울만한 것이 못되고, 개인적 이력 역시 익히 들어왔던 영웅의 면모에서도 모자란다. 친구들이 써서 보낸 편지에도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구색맞지 않은 내용들에 의아했으며, 절절한 구절도 도드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마을의 서로 돌봄을 말하는 김찬호가 '나를 안전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내가 온전히 용납되는 공동체'로 든 마을이 이 책을 빛나게 한다.
시리즈로도 충분한 자질을 보이는 이웃집OOO가 민주주의의 거창한 구호를 우리 삶 속에 끌어들이는데 좋은 역할을 하였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이다. 위인이나 열사를 모델로 정신을 다독이는 일은 한계가 있고 전혀 민주적인 발상도 아니다. 우선 나에게 묻는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열사가 될 수 있는가? 차라리 한 명의 열사가 되기보다 스무 명의 공공의 목소리가 되길 바란다. '이동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었고, 만나서 즐겁게 인사하는 이웃들이 속안에 무슨 생각과 꾀를 감추고 사는지 궁금했다'는 엮은 이는 심지어 '이웃집 한나라당, 이웃집 자유총연맹' 같은 토착적인 인터뷰를 해보고 싶은 바램을 이야기 한다.
장엄한 공로자가 들려주는 구호와 결의에 찬 발언들보다, 노동의 현장에서 땀흘리고 약자의 대변자였던 이가 동네 이웃에게 학생운동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민주주의의 작은 꽃씨가 어떻게 번지고 지역 곳곳에 꽃밭이 되어가는지, 그 작은 소란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도 들을 수 있고, 흥국생명시절의 노조위원장으로서의 과장되지 않은 공들도 읽을 수 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소문만을 무성히 듣고 직접 그 속내를 살핀것은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이런 역사를 역사시간에만 배우는 일은 얼마나 힘빠지는가. 그는 자기자리에서 민주주의의 역사를 이어쓰고 있었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
골리앗. 거인 최홍만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만 알고, 부끄럽게도 노동자의 투쟁에 사용된 전술이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고립된 장소의 고공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노동 운동에도 전혀 감흥이없던 일이 부끄러워진다. 그럼 나는 왜 노동자들의 권리에 이토록 무덤덤 했었는가. 답은 노동자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이었지만 내가 누린 권리는 일하는 것, 그리고 그만 두는 것, 둘 중 하나였다. 싸울 수 있는 권리를 나는 체득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그 누구도, 심지어 나조차도 책임지지 못하는 무책임한 삶을 살아왔다. 그의 싸움은 그가 더 많은 책임감을 짊어졌다는 걸 의미하기에 내가 버려둔 짐을 보는양 부끄럽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는 현대중공업의 뼛심 굵은 한 노동자가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시작한 노동자 투쟁의 기록으로 실명을 들었다 놨다 하며 힘있는 웅변을 들려준다. 그 싸움, 혹은 패배, 혹은 작은 승리의 기록은, 파업에 눈쌀을 찌푸리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목메는 노조란 어긋난 덮개를 벗기기에 충분했다.
그 유명한 투쟁인 골리앗에서의 투쟁을 포함해 수많은 전투?를 읽어 가면서 자본이 노동자를 어떻게 길들여 왔는지를 감상한다. 일종의 노동 운동 교본으로 쓰여도 될만한 이야기들이 주석을 달고 이어진다. 노동자를 회유하고 압박하는 사측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는 폭로만으로도 가능했다. '그때는 이랬더라면'으로 운을 떼는 구절들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면서 노동 운동이 가야할 길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지금껏 조명되지 못했던 노동운동의 민주화 기여도를 설득하고, 자본과 언론, 정치가 합세해서 노동자의 목소리를 가두는 현장을 공개하고, 공평하게도 노동운동의 변절자들과 함께 민주노총의 썩은 부위를 들여다보며 노동운동을 메뉴얼화한다. 또한 대화와 타협 같은 민주절차의 사탕발림이 노동자들과 어떻게 부딪히는 지를 감지하면서 민주주의의 또 다른 얼굴을 탐색하게 만드는 것도 의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