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놀이 책 몇 권을 모둠하면서 아이와 함께하는 요가책도 소개했었습니다. 일반 요가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티브이의 기인열전에 나오는 유리상자에 몸 구겨 넣기 같은 묘기는 없습니다. (실제 요가원에서도 그런 동작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더 놀라운 부분은 아이와 함께 했던 은연중의 몸 놀이들이 '요가'가 된다는 거죠. 결국 요가가 별거 아닌지, 내 몸에 요기의 피가 흐르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인도의 수행승들로부터 시작된 요가도 여느 수행법들과 마찬가지로 변신의 변신을 거듭했습니다. 기술인양 요가 자격증 시대가 도래하고 다이어트, 필라테스, 사우나와 결합하고 당연히 요가의 본질에서는 점점 멀어져 갔죠. 한 때 요가 수행법에 미쳐 독학하고 민간 요가 자격증(국가 공인 자격증은 현재로써는 없습니다)을 3개월만에 취득!한 다음 곧장 요가강사의 어줍짢은 명함을 얻기도 했습니다.
요가의 본고장에라도 가고 싶었지만 제 몸 하나 불편함 없는 걸로 만족스러웠기에 그런 서툰 고행은 감행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도 '요가'가 뭔지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단지 요가의 언저리에 머물다 온 샘이지요. 하지만 자격증을 따기 위한 수업말고 강사일을 하면서 월급의 8할을 쏟아붓게 만든 '티벳탄 펄싱 요가'는 아사나(동작)와 호흡의 하타요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뉴 마인드'라는 프로그램이 따로 있었는데 둘 사이의 경계가 뭔지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밀교를 떠올리게도 했고, 동시에 인간끼리의 과장된 포옹같기도 했습니다. 포옹에 거액을 쓸 사람은 없기에 의심이 드는 순간 내려놓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5년이 흐른 지금도 그 때의 감각은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요란한 환상이 될까 두려워 한 가지 건전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보통은 둘 씩 짝을 지어 수행합니다.
사진 출처 http://www.tibetan-pulsing.de/index.html
오늘의 세션이 '신장'이라면 신장을 상징하는 신체의 다른 부위(수지침처럼 입 속에도 각 장기의 부위가 있음을 말합니다.)와 실제 신장의 위치를 점검합니다. 그리고 '신장'에 얽힌 전설을 이해합니다. 전설이라는 표현을 쓴 건 신체의 과학적인 분석보다 감성적인 영역에 더 많은 함의를 두고있기 때문입니다. '심장 본래의 조화로운 펄스는 사랑의 진동'이라는 식입니다.
이 전기 혹은 맥박을 조화롭게 하는 힘이 '티벳탄 펄싱 요가'의 핵심입니다. 각 장기나 부위에 해당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짝을 지은 둘은 엉덩이 위쪽, 신장부위를 마주 댈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합니다. 한 사람은 엎드리고 파트너가 거꾸로 그의 몸 위에 눕습니다. (두 사람의 다리 때문에 X자 모양이 완성됩니다) 사람에게 실제 흐르는 약한 전류 때문인지, 상대의 전류가 전달되기 때문인지, 최면 때문인지, 그저 인간의 온기 때문인지, 타이머로 돌아가는 보일러의 점화 때문인지, 몸은 달아오르고 잠도, 꿈도, 각성의 상태도 아닌 휴지에 들어갑니다. 간혹 신장이 안좋으셨다는 분들은 놀랍도록 개운해진 느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저도 어떤 세션에선 머리의 뚜껑이 열리는 듯한 잡아당김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대체의학'의 모토인 치료보다는 치유, 신체를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심리적 장애의 상징물인 장기를 어루만지는 것입니다. 장기가 육체의 부속이 아닌 마음의 일부라는 듯이 '내부의 두려움과 충격이 방광에 전달되면 우리는 추종자가 된다' '쓸개는 유혹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낸다' 같은 도통 비유적으로 밖에 상상할수 없는 말들이 일상적으로 오고갑니다.
'티벳탄 펄싱 요가'는 매우 상징적인 수행법입니다. 하지만 거꾸로 우리의 모든 사랑과 미움과 분노와 질투와 우정이 가지는 행위들-악수와 포옹과 섹스와 거부와 애무와 구타와 손가락질-이 티베탄 펄싱 요가의 밑바탕처럼 느껴졌습니다. 가능한한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일상의 분절이 요가가 이룩한 위대한 분석력 같았습니다. 더불어 하타요가 역시도 일부러 수행법을 실천하기 이전에 나의 모든 일상이 요가의 무드라가 될 수 있기를 남몰래 바래왔습니다.(상당히 사이비죠!) 지극히도 현실적인 가운데 요가를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요.
도끼요가?
숲은 둘도 없는 내 일터다. 토요일을 애써 비우고 농장으로 갈 때마다 나는 손바닥만한 숲에서 꽤 오랫동안 보낸다. 도끼는 인간이 다루어 온 것 가운데 가장 건강에 좋은 연장이다. 늘 앉아서 글을 써버릇하는 사람들이나 사무직 노동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도끼질을 하면 굽은 어깨가 뒤로 넘어가면서 가슴이 펴지기 때문에 허파가 크게 열린다. 열다섯 살에서 쉰 살까지 남자들이 하루에 두 시간만 도끼를 휘두른다면 지구위에 소화불량이 사라지고 관절염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나는 도끼질이 서툴다. 하지만 도끼는 내 의사이자 기쁨이다. 도끼질을 하노라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생각에 빠져들지 않고 정신이 또렷해 진다. 몸에 있는 근육들이 맘껏 운동을 하지만 지치지 않는다. 사내라면 모름지기 도끼를 사랑해야 한다
-<월든>에 인용된 호레이스 그릴리의 말
이미 <웰니스>라는 책의 서평에서도 인용한바 있는 호레이스 그릴리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요가도 신체를 이용한 의식적 몰입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글에 요가라는 단어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동작과 호흡과 마음의 일체가 드러나 있습니다. 간혹 의무감과 근력만을 요구하는 것 같은 노동에도 육체와 마음에 대한 어루만짐과 통합이 가능했습니다.
하타요가는 호흡과 동작의 일체, 명상과 자각을 가르칩니다. 테벳탄 펄싱 요가에서는 인체를 회로로 보고, 감정을 기억하고 에너지가 흐르는 신체에 대한 일깨움을 골조로 수행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열 때 말했던 아이와 함께하는 요가도 오히려 일상을 모방하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평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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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짜피 요가가 대게 다이어트나 운동습관 정도로 인식되는 현실에서 '수행'이라는 품위는 효력을 잃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와 함께하는 요가는 특히 하타요가보다는 탄트라(상대가 있어야 하는) 즉, 티벳탄 펄싱 요가에 더 가까이 가 있습니다. 아이를 배 위에 올려 놓고 함께 호흡하는 일이나, 뱃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도록 감싸주라는 위 캥거루 자세 등등이 그렇습니다. 아이가 몸 전체나 한 부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접촉함으로써 몰입을 이끌어내는 행위는, 몸놀이이자 사랑이자 요가입니다. 동시에 아이를 위한 몸사용설명서이며, 몸에 대한 자각이 삶에 대한 맨 처음 감각임을 놓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가 하려는 말은 '요가는 일상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일부러 가부좌를 틀고 '옴'을 외지 않아도 우리는 시시때때로 명상을 할 수 있습니다. 원시부족의 달기기 비법을 다룬 <
본투런>에서도 타라우마라족의 달리기는 '명상'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목표물이나 효용성을 따지지 않고 달리는 본능, 달리는 몸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몰입 상태가 '명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호레이스 그릴리의 도끼질과 마찬가지로요.
하타 요가에서의 아사나(동작)에 붙은 이름들은 매우 시적입니다. 나무자세, 산자세, 영웅자세, 메뚜기 자세, 활자세...지극히 사적인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고 확장하면서 결국 '몸' 하나, 하나의 '점'으로부터 시작되는 큰 세계를 말하는 요가의 선(禪)은 일상의 모방이자 원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