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어떤 책처럼 '아이가 배워야 할 것은 모두 우리동네에 있다'고 믿는 엄마가 반색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우리동네 어린이 도서관 101%활용법>에서 마을을 산책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어린이 도서관 사례를 만났습니다. 저는 곧장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골목 어귀에 삼삼오오 모인 아이들이 소풍이라도 갈 모양으로 둘 씩 손을 잡고 노인정, 미용실, 식당, 공원, 구멍가게, 지업사, 시장 등등을 기웃거리는 겁니다. 가게에 딸린 방에서 아이들은 무슨 놀이를 하는지, 할머니 할아버지의 하루는 얼마나 느리게 흘러가는지, 짜장면 집에 전화기가 얼마나 자주 울려대는지, 미용실 원장님은 언제 의자에 앉으시는지. 말하자면 우리의 이웃들은 어떤 일을 하면서 땀을 흘리고 시간을 보내는지 살피는 겁니다. 

실제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도서관을 구심점으로 마을 공동육아를 지향하는 책으로 무척 반가웠습니다. 또 실제 그런 가치를 담은 아이책이 있다면 좋겠다는 바램도 생겼구요.

실은 아이의 하루일과는 제가 한 상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장이나 놀이터, 시할머니 댁으로 걸어가는 날이면 온 동네가 구경거립니다. 대게 시간약속이나 목적지가 없는 여정이라 아이를 채근하는 일 없이, 오히려 제가 더 기웃대면서 길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요샌 모퉁이에 새로 들어선 '생각 만들기'라는 도예가게에 불쑥 들어가 흙 빚는 광경을 넋이 빠지도록 구경하기 일쑵니다. 레스토랑 '메이'에서 마련한 대기 손님들을 위한 벤치는 서영이의 단골 휴식터이기도 합니다. 운이 좋으면 막 가게 문을 여는 젊은 여급의 재빠른 일솜씨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남슈퍼' 앞의 마루도 모녀의 시원한 정류장 입니다. 한동안 앉아 있으면 개를 데리고 산책나온 아줌마나 쥐포와 함께 막걸리를 자시는 어르신들과 잠시 말을 섞을 수도 있습니다. 지업사나 미용실에 들르면 온통 신기한 물건 투성입니다. 귀가길에 들렀던 골목어귀 할머니 집에는 올해, 보리 이삭이 새파랗게 섰습니다. 
 
작은 동네의 구겨진 듯한 집 속에 튼튼한 가장과, 채소모종 같은 아이들과, 이웃과 교환할 먹을거리 입을거리를 구비한 바지런이들과, 동네 몸단장 집단장을 도맡아 하는 재주꾼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긴밀함은 엄마에게도 많은 생각을 던져줍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지만 도시에서 공부를 마친 제게도 적당한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움텄습니다. '똑똑하게 기르기'라는, 나도 모르게 주어진 육아 목표가 지방의 작은 도시로 시집오면서, 또 한번 시나브로 수정되고 있었습니다.
 
집 안에서 엄마와 단둘이 하는 창의력과 상상력, 수학능력을 위한 한가지 놀이, 두 가지 배움이, 집 밖에서 '일과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소중할까라는 생각이 문득 찾아왔습니다. 둘 사이를 저울질 하기에 저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하지만 육아서들이 기형적으로 권장하는 아이의 능력 선점에 대부분 '마을 육아'가 빠졌다는 사실은 확실히 부당한 처사같았습니다. 오히려 육아서가 아닌 인문서, 동화책, 문학에서 육아를 상상하는 일이 제법 균형을 잡아주기도 했습니다.

이 두 권의 책이 반가운건 '직업 체험'이라는 이름하에 부각되는 또 다른 학습이 아니라, 직업과 삶, 즉 이 시리즈의 이름인 '일과 사람'에 촛점이 맞춰진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아이들을 위한 인문학 도서라고도 부를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마을이다>를 써서 마을에 대한 의미를 되새긴 조한혜정님의 추천사도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제 일과 사람에 대해, 일하는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마을에 대해 다시 상상할 때가 되었다. '먹고, 입고, 자고, 배우고, 즐기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사이좋게 사는 마을은 어떨까? 우리 이웃들의 삶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살고 싶은 행복한 마을을 가꿀 수 있다. 그분들이 하루를 어떻게 지내는지, 일 년을 어떻게 꾸려 가는지, 언제가 가장 행복한 때이고 언제가 힘든 때였는지 귀 기울여 보자.









퍽이나 인상적이었던 <짜장면 더 주세요!>는 신흥반점의 살림방에서 자란 딸이 쓴 책이라는 고백같은 '작가의 말'에 감동을 더했습니다. 처음 일하는 사람 이야기를 쓰려고 했을 때는 무슨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자신도 잘 몰랐다고 함니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나고 어느새 '일하는 사람'이 된 딸은 신흥반점의 주방장인 아빠가 아침 일찍 장을 보며 했던 말, 엄마가 마수손님(첫 손님)을 보고 그날 장사를 점쳤던 일, 하루 장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 엄마랑 아빠가 조곤조곤 나누던 말소리를 진심으로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또 짜장면을 맛있게 먹던 이웃들까지 보였다는 말에는, 어느 동네에나 있는 작은 중국집이 얼마나 큰 통로인가를 새삼 느끼게 합니다.  


<딩동딩동 편지 왔어요>는 우편 집중국, 창구, 분류, 배달 같은 정보에서부터 아주 시시할 수도 있는 우체부들의 팁, 노고, 여성 우편집배원의 평범한 하루를 밀착해 확대하는 저력을 보여줍니다. 특히 산너머 마을로 가는 배달에서 읍내에 나가기 힘드신 어르신들을 위해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따뜻한 메신저의 역할을 부각시킵니다. 소리없이 움직이는 것들, 그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빛나는 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정스런 우편집배원의 역할은 물론이고 의당 믿음으로 결속된 이웃들간의 우정은 삶의 냄새를 진하게 풍겨옵니다. 

빨간 우체통을 열고 사연이 담긴 편지를 바라보는 집배원의 얼굴이 마지막장에 클로즈업되면서 굳이 일의 기쁨을 설명하지 않아도 될만한 진한 감동이 찾아 옵니다. 어둠에 휩싸인 신흥반점의 밤 역시 서정성을 무기로 시같은 구절을 끌어냅니다.


나는 잘 때 아빠 엄마 손 냄새 맡는 게 좋아. 맛있는 냄새가 나거든. 아빠 손은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 엄마 손은 짭조름하고 새콤한 냄새. 오늘을 내 손에서도 냄새가 나. 새콤달콤 단무지 냄새. 

이 희미한 삶의 냄새들로 아이를 자극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마을 사랑은 가느다란 실선의 거미줄과도 같이 아이 마음 속에 연하게 새겨지길 바랄뿐입니다. 그저 너와 내가, 노동과 돈이, 사람과 사랑이, 분리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희미한 냄새들을 전해 주고 싶습니다. 영어 원서 보드북 한 권보다 탄탄한 삶의 디딤널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짜장면 더 주세요>로 순진하게 수타면 만든 사연♥ 







왠지 가능할 것 같았죠. 하라는 대로 다 했습니다. 꽈배기처럼 꼬고 반죽 두 끝을 쥐고 흔들면서 늘리고 도마에 탕탕쳐댔습니다. 칠 때마다 끊어졌구요. 다시 반죽하고 접고, 흔들고, 때리고, 또 끊어집니다. 치댈수록 끈기가 생긴다지만 다섯번 반복하고 그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겨우 칼국수 짜장을 먹었다는 기막힌 헤프닝. (신흥반점 딸은 역시 비법을 공개하지 않는군요.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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