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
한지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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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로 완성된 허구의 세계는 바둑판이나 퍼즐같은 가상의 게임 같습니다. '현실'의 완성도는 요람과 무덤의 데칼코마니, 단 하나 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작품'에서의 완성도는 매 게임을 치루는 작가의 전투력 입니다. 작품 속의 한 단어, 작은 에피소드는 자석처럼 어딘가를 향합니다. 게임이 승리를 위하듯 작가들은 메타포로 전술을 꾸밉니다. 

이런 생각들이 저절로 드는 소설집 한 권입니다. 속어이긴 하지만 와꾸(틀)가 잘 맞는 다는 이 느낌은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가 다루는 부재(구멍)와 부재를 메꾸는 실물의 대응이 대략 뚜렷하다는데서 옵니다.

다섯이 눕기도 비좁은 집을 교대로 들고나는 가족들의 살림살이와, 재개발 선고로 쫓겨나는 사람이 가장 많은 비좁은 도시 서울은 같은 그림을 그립니다. 이제 오빠만 더 살이찌지 않는 다는 조건 하에 '나한테는 택시가 있는' 아빠가 바깥살림을 한다면 이 집은 다섯가족에겐 꼭 맞겠군요. 하지만 자고 나면 '나'는 키가 크고, 오빠는 살이 쪘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게을러터진 오빠가 어쩌다 편의점 밤근무 자리를 얻게된 횡재 덕에, 비로소 해답이 나온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군요. 

비우고 메꾸기 작업은 공사판처럼 나날이 새로운 상황을 전개합니다. 작가의 퍼즐 놀이가 '미스터 택시 드라이버'의 경우 유쾌하고 분명하네요. 아얘 천 피스 만피스짜리 퍼즐을 파는 남자도 등장시킵니다. 인근 백화점에서 수건을 팔고 있는 여자와 퍼즐 한 개로 운명을 가장하는 뻔한 도식을 작가는 어떻게 풀어 낼까요. 앞서 말했던 '부재'가 그 답입니다. 의사는 기어코 상상임신이라고 하지만 월경이 멎고, 헛구역질이 나고, 배는 부풀고, 부정할 수 없는 태동을 감지합니다. 산달이 다되가서 된장찌개를 올려놓고 나간 남편(퍼즐을 팔던)도 사라집니다. 남편과 아이 정말 잃어버린 걸까요.

'실종'과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가 말해주듯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가 브리핑하는 '부재'는 잃어버렸으나 원래 있지도 않았던 것들에 대한 얘깁니다. 원래 있지도 않았는데 잃어버렸다니 꼭 납량특집 같습니다. 잃어버린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보류한다해도 이 소설집엔 분명 '뭔가를 잃어버린 자'들로 수두룩 합니다. 범인은 없는데 피해자로 가득한 경찰서 같습니다. 사라진 사람과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원혼처럼 지상을 떠돕니다.    

메워질리 없는 그 허탈한 구멍은 소설 속에서 어떻게든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청력을 잃었지만 몸으로 소리를 듣고 듣지 말아야 될 소리까지 들으면서 불구의 남자의 수음을 돕는 '소리는 어디에서 피어나는가'가 그렇습니다. 만난적 없이 헤어지기만 해도 연애가 되는 '4월이 오면 그녀도 오겠지'도, 잃어버린 것을 아얘 죽은 것으로 대치시키는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도 그렇습니다. 하나의 단편은 다른 단편의 상징어가 됩니다. 통틀어 이미 있지도 않은 것들의 '실종'을 다룹니다.

진술만 믿고 없던 것을 진짜 없다고 할지, 혹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할지는 독자가 결정할 일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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