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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척하는 철학자를 구워삶는 29가지 방법 - 통념을 전복하는 철학적 수다
미셸 엘트샤니노프 외 지음, 김모세 외 옮김, 이현우 해설 / 살림Friends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엘리베이터의 문을 빨리 닫히게 하는 버튼은, 버튼에 손을 대는 사람에게 자신이 엘리베이터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는 일종의 심리적 안정제와 같다."
지젝은 여기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치적 과정에 대한 은유를 발견했다. 시민들의 투표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환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제안하고 있는 후보들 중에서 선택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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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알려주는 층수를 누른 뒤, 재빨리 지젝의 버튼(닫힘 버튼)을 눌러라. 그런데 운이 없게도 당신은 다시 문이 열리게 하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순간 옆에 있는 여인의 얼굴이 뻣뻣해진다. 당신은 재빨리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지젝의 안정제입니다."
상대가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당신은 겸연쩍에 미소 짓는다.
철학과 괴상쩍은 상황극의 만남? 일단 호기심은 충만하다. 시를 지어 한 수씩 주고 받는 고수들처럼, 철학을 철학으로 맞대응하겠다는 흥미로운 연극으로 풀이된다.
수많은 대중문화를 사례로 동원하면서 우리시대의 스타 철학자가 된 지젝의 말과 엘리베에터에 대한 다양한 담론 간에는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이런 장난스런 익살극이 철학자가 펼친 진지한 사유보다는 소화되기 쉬운건 분명하다. 자못 우스운 건 철학자의 말에 의미를 풍부히 더하는 것보단, 모호하게 만드는데 더 큰 힘을 쏟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후 아페리테프(식전주?), 앙트레(식전요리?)주요리, 샐러드(커피와 식후주까지)의 재료가 되는 철학자들의 이름은 눈이 부시다. 장 보드리야르, 칼포퍼, 하이데거, 시몬 드 보부아르, 발터 벤야민..참고로 지젝은 도착, 이었다.(초대 된 집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모양이다) 코스마다 다뤄지는 철학자를 달리해서 독자를 철학자들의 저녁식사(철학자로 만든!)에 초대하겠다는 다소 장난끼어린 시도의 책이다.
철학을 대하는 태도를 점검할 수도 있다. 심각하고 고답적인 인문학의 한 갈래 정도로 여기던 '철학'이 가벼운 에피타이저가 되거나, 싱싱한 야채를 씹어 입을 씻는 샐러드가 될 수도 있다는 영감이 팍팍 온다. 이 중 가장 맛있었던 음식을 골라 진지한 탐구로 이어지는 것이 이 디너파티의 진정한 게임이겠지만, 자주 거론되는 유명 철학자들과의 가벼운 일면식으로도 충분히 들뜨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