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쥐앙 또는 석상의 잔치
몰리에르 지음, 이화숙 옮김 / 기린원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돈 쥐앙, 400년 만의 초역판이라니 참 오래도 걸렸습니다. 카나노바와 함께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불렸던 위대한 이름이 왜 이제서야 제 모습을 드러냈는지 의아했습니다. 원본이 함께 실려 아담한 책의 반분량이니 부담없이, 한 달음에 읽어내립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읽기에도 굉장했던 속도감은 몰리에르가 추구했던 희극의 새로운 양식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비극보다 수준이 낮은 것으로 여겨졌던 희극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비극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이 작가는 오로지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만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작가이자 배우이자 연출가였던 그에게 이 생생한 현장성은, 고지식한 종교계나 고전주의 이론가들에겐 논쟁거리,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종교를 모독했다는 혐의로 공연이 금지 되기도 했었답니다. 



 
웃지 않고는 못배길 재미가 있다고 담보하는 건 못된 짓일테지만, 낯낯의 얼굴과 익살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즐거운 희곡한 편이었습니다. 당시의 희극 상황을 감안하자면 분명 앞서간 것이었겠지요. 

거장들의 유머는 '웃기는'것이라기 보다는 '비웃는' 것이기에 뼈아픈 웃음이 유발됩니다. 그곳에 희극의 깊이가 달려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인물이 얼마나 입체적으로 그려졌느냐, 해석의 가능성이 얼마나 열려있느냐가 고전의 생명력을 이어가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주제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인간이 행하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하는 작가의 상상력에 극찬을 마지않습니다.
 
타락한 자유주의자, '나쁜 남자'의 대명사, 종교든 그 무엇이든 믿지 않는 자, 사랑의 간신배, 방탕한 귀족-동 쥐앙을 역자는 이렇게 설명해 두었습니다. 


성스러운 질서에 겁없이 도전하고 죽는다는 점에서는 프로메테우스를,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미지만을 사랑하다는 점에서는 나르키소스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것과 같은 금기를 위반한다는 점에서는 오이디푸스를, 끝없이 욕망의 바윗돌을 밀어 올린다는 점에서는 시시포스를, 비련의 사랑끝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는 트리스탄을, 악마와 계약을 맺는다는 점에서는 파우스트를 닮았다. 

여자에게 충실한다는 것을 거짓 명예로 알고, 굳은 지조란 등신들에게나 어울린다고 선언하는 수백년 전의, 대놓고 나쁜 이 남자에게 오히려 귀여운 면모를 발견합니다. 비극적 깨달음은 도덕적 두려움을 낳기도 하지만 우스꽝스럽도록 솔직한 그의 발언에 인간본래의 욕망과 겁없이 마주합니다. 하느님과, 의사(절대권력)를 능멸하는 언행이나 위기때마다 말을 바꾸어 상대를 속이는 잔재주는 독자를 즐겁게도 하지만 씁쓸하게도 하는 그런 것이지요.
 
믿음을 상실하고, 사랑을 저버리고, 상대를 속이는데에 대한 천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동 쥐앙이 죽어버리는 결말에 고민이 생깁니다. 악에 대한 심판의 차원일까요? '동 쥐앙은 모두 틀렸다'는 대답이었을까요? 헌데 어쩐지 동 쥐앙은 이상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아! 기분이 이상하네! 눈에 보이지 않는 불길이 나를 태우는구나. 아, 못견디겠어. 온몸이 피어오르는 불꽃같아. 아!

파멸의 순간에 오르가즘을 느끼는 모습이 선연한 것은 오로지 동 쥐앙의 죽음에 허망한 제 마음 때문일까요. 동 쥐앙의 하인 스가나렐은 '그의 죽음으로 누구나 다 만족했겠지.'라고 되뇌지만 저 역시 급료를 받지 못한 하인처럼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진정한 심판이라면 동 쥐앙의 교화만한게 있을까요? 제 멋대로 살다가 돌연 맞이하는 죽음은 동 쥐앙의 정신이 여전히 살아남았다는 증거로 보입니다.
 
혹시 당시의 지체높은 검열때문에 몰리에르가 벌인 사기극은 아니었을까요. 죽음으로 권선징악을 대변하고 결단코 동 쥐앙의 자유로운 영혼만큼은 손 하나 대지 않은 보기좋은 수법 말입니다. 진정, 마음 속에서 동 쥐앙을 죽일지 살릴지 결정하는 건 독자의 몫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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