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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투 런 Born to Run - 신비의 원시부족이 가르쳐준 행복의 비밀
크리스토퍼 맥두걸 지음, 민영진 옮김 / 페이퍼로드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이키 운동화의 비윤리성은 나이키의 과학을 이기지는 못했다. 혹시 타라우마라족의 맨발은 나이키를 이길 수 있을까? (사진출처)
지도에도 없는 멕시코의 척박한 벽지에 오두막을 짓고 돌멩이들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인 달리기 미치광이 카바요가 사랑하는 땅. 그 곳의 원시부족 타라우마라족은 샌들만으로 고산을 평지처럼, 협곡을 고무줄처럼 타넘는 초인적 습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줍음을 지녔다. 팔릴만한 물건이라면 영혼이라도 주머니에 넣을 챠보지(타라우마라족에게 모든 이방인은 이렇게 불린다)들은 울트라러닝(일반 마라톤보다 험난하고 긴 코스)으로 그들을 끌어낸다. 겨우 옥수수 몇 말로.
그렇다고 <본투런>이 미개부족에 대한 연민이나 신기를 다룬다고 생각하면 많이 안타까울 것이다. 권법의 고수처럼 프리메이슨의 등급처럼, 이 책에는 다양한 달리기의 현자들이 떼를 지어 등장한다. 또 소림축구의 주성치가 희대의 영웅들을 호출해서 말도 안되는 축구팀을 만든 것처럼 달리기의 신기원들을 모아 '달리기란 이런거야'라며 발끝을 툭툭차서 50km 전방의 계곡에 착지하는 식이다. 이 다소 황당한 실화가 건강 잡지의 칼럼니스트의 취재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얼떨떨하다.
지구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행복한 종족, 그리고 강인한 종족이라는 칭호를 얻는 타라우마라족은 80세 노인이 산중턱을 내달릴 정도로 대단한 달리기 실력을 빼면 매우 수줍고 소박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원시부족의 미덕을 발휘한다. 덧붙여 위대한 달리는 명상자들의 면면은 울트라 러닝이 아니라면 한심할 정도의 일상을 영위한다는 사실도 남다르다.
('달리는 동물' 스콧과 타라우마라족의 아르눌포)
그들은 엄밀히 말해 원시부족의 이방인이 아니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역사의 반대 편에서 출발하여 정확히 중간지점에서 만난 주자들이다. 이 화기애애한 화합의 장면은 드라마처럼 후반부에 이르러서 연출되지만 그 여정은 각종 소림의 영웅담을 모아놓은 듯 하나하나가 각별하다.
타라우마라족의 비밀을 뒤쫓는 연구자인 카바요도 오직 그의 근육에 역사를 기록했을 따름이다. 파티하는 것처럼 달리면 타라우마라족도 이길 것 같은 젠과 빌리는 <달마행자들>로 트레일러닝을 배우고 찰스 부코우스키(미국문학의 이단아이자 타고난 술고래)에게서 영감을 얻는 21세의 연인이다. 맨발의 테드는 세계 최고의 탄력, 최상급 운동화와 뒤꿈치 패드에도 고질적인 발목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신발을 벗어 던져 자유를 찾았다. 경주를 시작할 때마다 지르는 오싹한 비명과 경주를 마치면 흥분한 사냥개처럼 흙바닥에 구르는 스콧은 카바요가 점찍은 순수한 달리는 동물이다. 작가이며 타라우마라족의 비결을 배우고 싶은 형편없는 주자가 그려낸 이들은 정말 사랑스런 괴짜들이다.
이 괴짜들에게 과연 게으른 우리는 무엇을 이식받을 수 있을까. 운동은 몸에 좋다는 또 하나의 단서? 이 참에 값비싼 나이키 신화를 깨보자는 혁명? 인류가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라는 확신? 원시부족에 대한 한없는 경외? 달리기의 창조성에 대한 새삼스런 감회? 달리는 주자들이 전하는 소박한 삶에 대한 가르침?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을 오랫동안 뜀박질했지만 그 무엇보다 지겹도록 들어왔던 '사랑'이란 단어가 <본투런> 독서를 관통하고 말았다. 도대체 사랑이 달리기와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비질이라는 달리기 코치는 걸어서 오르기도 힘겨운 언덕을 싱거운 웃음으로 평지를 달리듯 하는 이 괴짜부족을 보고, 도서관에서 고서를 발견한 학자처럼 감격하고 만다. '타고난 주자'들은 영감에 사로잡힌 예술가처럼 달린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타라우마라족의 그것은 '달리는 방법'이 아닌'사는 방법'이었음을 발견한다.
<본투런>의 주자들은 타라우마라족과 마찬가지로 달리는 것이 사는 것이었고, 삶을 사랑하는 것이 달리기를 잘 할 수 있는 비법이었다. 그들의 삶이 44사이즈의 미관이나, 트로피나 상금, 푸쉬 프레스 위의 근육질을 위한 것이었다면 달리기는 때론 고통이고 인내이고 한계였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처럼 먹는 일을 당연히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원시부족에게 달리기는 전투나 비즈니스가 아니라 순수한 기쁨일 뿐이었다. 없어도 그만인 옥수수 몇 자루와 우정의 축제를 위해 달리고, 즐겁게 살았다.
'운동'이 슬로건처럼 자기계발의 중심부로 떠오르는 시대에 달리기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마술같은 전복을 통해 거꾸로 우리에게 '달리는 영혼'이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헬스장이나 요가원, 러닝트랙, 좋은 신발을 위해 또 다른 소비를 시작하는 우리를 질책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원시부족의 무용담 정도로 여긴다면,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나이키 스스로도 인정한 신발의 과학에 빠진 밑창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딱딱하고 부드러운 신발이 실은 충격흡수에서 별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으며 나아가 푹신한 신발이 발과 무릎에 악영향을 키칠 수도 있다는 증거들. 신발이 발을 옭아매는 그물이고 깁스며. 바닥과의 정보 교환을 차단하는 발의 수면제라면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아주 얇은 신발을 신고도 그들의 발이 튼튼하고 부상도 적은 점은 지금 당장 수줍은 시도를 해보고자하는 용기를 준다.
달릴 때의 좋은 느낌, 가깝게는 전속력으로 질주했던 어린시절, 멀게는 '달리는 사람'을 맨 처음 동굴벽화에 그려넣었던 인류의 최초를 내 몸으로 시연해보고 싶은 쾌감이 몰려온다. 분명 그들처럼 살 수 있다면 그들처럼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처럼 달릴 수 있다면 그들처럼 삶을 사랑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기를 쫓지 말고, 달리기 본능을 꺼내 들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