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쟁이와 저녁식사를 - 신현정 시선집
신현정 지음 / 북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바보사막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생길에 오르는 것이니

출발하기에 앞서

사막은 가도가도 사막이라는 것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이 행렬이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도

또 자리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는 것

아 그리고 그리고는 난생 처음 낙타를 타본다는 것

허리엔 가죽 수통을 찬다는 것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간다느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는 것이다

오 모래 위의 향연이여.

                                                         -신현정 시선집 <난쟁이와 저녁식사를>에서


오랜만에 다시 시작한 詩공부. 시를 배울 수 있는 길은 시를 읽는것 밖에 없다고 말한게 누구였던가. 나를 오랫동안 채찍질한 그 말의 주인도 잊은 채, 난 간혹 잃을까 두려운 詩心을 불러오기 위해 이 얇고 무거운 책을 손바닥에 올린다. 헤밍웨이라면 '난 영감의 우물을 닳게 하지 않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네'라고 서신이라도 보내주었겠지만, 여전히 나는 나의 글통이 바닥날까 두렵다. 어짜피 인정해왔던 일이지만 난 많이 타고난 글쟁이는 아니므로 그것이 늘 걱정인 것이다. 그래서 내 눈에, 이 좁은 식견으로 천부적인 글쟁이들을 만날 때마다 부러움을 감출 수 없다. 그들은 작품과 더불어 삶으로도 시를 쓰고 이야기를 짓는 것이다. 가지지 않은 자의 환상일 지도 모르지만 가지기 전까지는 환상의 감옥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운명이 아니겠는가. 

故 신현정 시인의 49제에 맞춰 출간되었다는 <난쟁이와 저녁식사를>은 타고난 시인의 언어를 보는 것 같았다. 모든 비유들이, 구상들이 제 자리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어느 내면의 강가에 머문것 같았다. 특출한 시선도, 놀랄만한 감각도, 대단한 새로움도 없다는데 더 감명깊은 시선이다. 그저 주루룩 흘러 다을 곳에 닿기만하면 되는, 거기 신현정의 시가 있다고 할만하다. 어떤 면에서 천상병의 어리숙하고 아이다운 느낌도 오버랩된다. 그들도 설마 거미가 거미줄을 뽑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들을 엮지는 않겠지만 시적인 형식을 벗어 시를 만들고 있는 천진난만함이 무척 자연스럽다.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오히려 낡은 사유가 돗보이는 바보사막의 가장 평범하고 아름다운 구절로 뽑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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