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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정치학 ㅣ 현대시세계 시인선 20
신혜정 지음 / 북인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먹다
먹통의 시대에 자판기는 일단
동전을 먹고 들어간다
동전을 먹은 자판기가
음료를 배출하지 않고
자판기를 향한 힘찬 발길질이
고통으로 돌아온다면
흐릿하게 바랜 관리자의 전화가 불통이라면
모종의 화해는 깨지고 우리는
'소통의 부재'라는 학문적 고찰에 이른다
학문적 고찰은
동전을 먹은 자판기의 처분을 둘러싼 논쟁을 양산한다
혁명가들이라면 자판기를 부수고 음료를 쟁취할 것이다
온건한 소장파라면 책임자를 만나보려고 할 것이다
세균과 먼지고 둘러싸인
꽉 막힌 구멍의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사이
여전히
세계를 향해 입을 벌린
시커먼 구멍
방치된 권력의 퇴보는
거기서 나온다
어차피,
누군가는 무엇을
먹는다는
누구에게나 먹히는 이야기
구멍은 컴컴하고
오늘의 이슈가 내일의 신화로 탄생하는
복원 불능의 지점에서
여전히
자판기는 먹통이다
-신혜정의 <라면의 정치학>에서
어떤 시를 골라 표제로 삼을까 두 달째 고민중 이었다. 그래도 역시 시집의 표제가 된 '라면의 정치학'이 낳았겠지만
현대는 엑기스의 시대다
정보의 집합체에 접근하기
혹은 접근 금지의 아고라에 모여들기
농축이 아닌 것들은 천대 받는 시대
로 시작하는 <라면의 정치학>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투의 시가 고르고 싶어졌다. 두 편 다 시대에 대한 직설로 이루어진 詩이긴 하지만 조금 온순한 편인 <먹다>가 '라면의 정치학'과 더불어 시인이 구축한 근성을 엿볼만한 작품 같았다. 시에 무슨 근성이 필요하냐고 묻겠지만, 신혜정 시인의 시들은 '살아남기'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 엑기스의, 먹통의, 육식의, 폭력의 시대에서 연약한 피해자로 남을 것인가, 피켓을 들고 징글맞게 싸울 것인가 물을 때 시인은 서슴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詩로 싸우는 일은 고매한 경지로 가능해 보인다는 게 결론이다.
직격탄의 언어들이 출몰하기 전에 그녀의 시들은 얄궂은 정도의 그림을 연출하곤 했다.
동태의 남은 눈깔이 애원하듯 그를 쳐다보았네
그는 한 쪽 눈만 남으 동태를
재빨리 안개 속에 묻어버리고
담장으로 훌쩍 뛰어오며
'이짓도 못 해먹겠군'
입맛을 다셨지
숨결같은 파도가 담장을 적시고 있었네 -<오! 동태> 부분
약간 걸출하거나 섬뜻하긴 했지만 충분히 시적인(좁은 의미에서) 내포를 품은 묘사시들이 많았다. 그로테스크한 장면만으로 긴장감어린 분위기를 끌어내는 언어의 '점입가경'이 상당수의 시에서 나타난다. 이런 시들과 구분되는 것들이 바로 미군기지의 아이러니를 담은 <평화의 눈>시리즈나 <라면의 정치학>, <먹다> 등이다. '詩'를 꿈꾸던 시인이 '時(때 시)人'을 꿈꾸게 된 광경을 목격한 것만 같았다.
시라는 것은 세상과 격리되어서 아름답기도 하고 세상과 밀착되서 아름답기도 하다. <라면의 정치학>은 언뜻 시인의 꿈을 꾸었던 파릇한 감성들이 세상과 부딪혔을 때, 흙을 뚫고 나올 정도의 파워를 드러낸다는 점이 아스라하게 묻어있는 시인의 처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