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
김선미 지음 / 마고북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에 기분 좋게 속고 말았다. 블로깅 중 우연히 발견한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는 평범한 세 모녀의 특별한 여행기라고 짐작했었다. 다니던 직장에 그만둘 각오로 한달의 휴직계를 쓰고 어린 두 딸과 보름간의 야영기록을 담은 김선미씨의 책이다.  

남편도 홀로두고 마로네 세 모녀가 집 앞3번 국도를 따라 남쪽 끝까지 가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정말이지 특별해 보였고 게다가 제목처럼 '길 위에서' 잠도 자고, 밥도 먹는 텐트 생활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 모든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책을 열기도 전에 내 몸이 근질거리며 떠날채비를 하고 있었다. 집을 팔아 세계일주를 했다던 신문 속의 가족 이야기가 대단해보이긴 했지만 피부에 닿는 여행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이 세계일주를 한 가족만큼이나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기행문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그들은 1999년 가을, 경기도 광주의 원적산 자락으로 이사해 가족들끼리 '별밭'이라부르는 시골마을에 8년째 살고 있었다. 밥벌이를 위해 서울로 힘겨운 출퇴근을 하면서도 별밭을 떠나지 못하는 네 가족은 자연을 진정 벗으로 여긴다. 각각 '높은 산''큰 바다'라는 뜻의 마로와 한바라는 두 딸의 이름이다. 두 딸은 왠만한 놀이동산보다 도서관을 좋아하고, 서울에 가는 일을 도시체험학습으로 아는 특별한 아이들이다. 산악전문지 월간<MOUNTAIN>에서 일하는 저자 김선미씨는 생협을 통해 농산물을 받아먹고 남편과의 연애를 등반으로 했을 만큼 산과 자연을 사랑한다. 

이 정도면 우리 눈에 도통 평범한 경지는 아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현대는 세계일주보다, 이 가족처럼 생태주의를 실천하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지 모른다. 필요와 쓸모, 편리함과 쾌적함에 한없이 길들여져 그 외의 가치를 외면했던 나의 삶이 길 위로 나온 그들과 부딪히고 또 섞이기도 한다. 마로네 세 모녀 역시 세상과의 충돌을 숨기지는 않았다.

아이들에게 스팸을 먹이기 싫어서 나중에 나중에라고 미루는 김선미씨의 고투가 여행중 '식'의 해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 아빠가 없는 자리에 들어선 궂은 일에 대한 감회가 딸들과의 토닥거림으로 진솔하게 드러난다.  

'기행문'이라고 하면 읽기에도 지루하고, 쓰라고 하면 더 고역이고, 온통 금수강산이나 유적지에 대한 미사여구로 가득차, 아름답지 못한 장르라고 생각했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이어 <아이들은..>은 기행문의 통념을 깨뜨려준 고마운 책이다.

유려한 장관의7번 국도가 아닌 집 앞의 길이 어디로 통하고 어디서 끝나는지를 목적으로 하고, 숨어있는 야성 깨운다는 야영 생활을 감행한 것은 여행의 새로운 이정표로 남을 듯 하다. 

마로와 한바라의 일기가 보름간의 여행일지에 포함되어있는데, 내겐 이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솔직 담백 간결한 두 딸의 일기 솜씨에 여행의 정수를 맛보기도 했다. 한바라는 여행 내내 길에서 만나는 문화재들이 보물찾기 놀이 같다고 재미있어 했다. 빠질 수 없는 여행팁들은 가족야영을 염두해둔 독자라면 매우 유용할 것 같다. 실용적 팁도 팁이지만 낭만적 생태적 충고도 잊지 않는다.

야영장에선 어둠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그런 시간을 충분히 느낀 다음, 불을 밝히는게 좋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바람소리, 새소리 같은 것에도 예민하게 귀가 열린다.      

산악전문지의 기자답게 전국을 누빈 품새가 은근히 드러나고, 장소에 걸맞는 추억담이 아스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대단한 관광지나 굳이 볼만한 꺼리가 아니어도 어떤 식으로 여행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지, 나무 한 그루가, 시멘트 돌탑이 여행의 기쁨을 어떻게 선사하는지 섬세하게 다가간다. 간혹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감정을 초월하기도 한다. 결국 기행문이 주는 즐거움은 우리의 감상을 확장시키는 일 같다. 

저자는 이 여행이 가능한  한 불편하고 힘들게 움직여야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자신감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아이들을 위한 여행이 오히려 내가 배우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고도 말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아이들은 길 위에서 새로운 꿈을 향한 불씨를 당기고 어른들은 들뜬 일상을 차분히 돌아보고, 독자는 집 밖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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