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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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위에 집어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찬,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 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 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기형도 전집에서

소설의 한 단락처럼 느껴지는 <여행자>라는 시는 조금은 자기비하에 빠진 주인공이 있고
그에게 무슨일이 생겼는지 왜 떠나야 했는지 묻고 싶은, 잘린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시 안에 들어앉은 서사가 시를 매우 흥미롭게 만든다. 시의 다양한 해석의 여지는 난해함과 즐거움을 동시에 제공하지만
크게 해석이 필요한 구절이 눈에 띄진 않는다. 그저 이 상황을 내 몸 속에 통째로 집어넣으면
어딘가에 꼭 맞는 기억이 존재할 법하다. 우리 모두가 인생의 여행자로서 느꼈을 한 지점을
시인의 예민한 촉수로 더듬어 준다.
어디로 가야할 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지만 우리가 어디쯤에 와있는지 살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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