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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푼도 못 되는 그놈의 양반 - 박지원의 한문 소설 ㅣ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11
김수업 지음, 최선경 그림 / 나라말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소녀는 문학선생님을 사랑하는 진부한 우를 범했지만 교과서의 문학작품까지 사랑하진 않았다.시를 탐독했지만 김소월 한용운의 시를 시라고 여기진 않았다. 늘 교실 밖에서 문학을 찾아 떠돌았고 님의 침묵을 개구리처럼 해부하는 국어 시간은 과학시간보다 흥미롭지 못했다. 문학소녀가 사랑하는 문학선생님도 별 수 없이 탁월한 분석력을 뽐내며 주제를 일갈했다. 문학소녀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문학에의 도피였으리라.
자유롭게 문학의 뒤를 쫓을 수 있는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에 이르러서도 이육사 박목월 한용운 이라면 시집 한 권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한 반 쪽짜리 哀詩가가 되버렸다. 이렇게 반신불수 문학 애호가를 만든 우리나라 교육형태에 먼저 성토할 일이지만, 십 년이 흘러서라도 다시 위대한 그들을 되새김질 할 수 있는 발판 역시 교과서 이기에 할 말을 잇지 못한다.
박지원 이라면 조선시대 실학자로 '외우고'있고, 그의 작품 역시 교과서에서 한 두편 봤음직하다. 분명 주제와 의미를 찾아내느라 중요한 구절에 밑줄을 그었을테고, 선조의 지혜에 강요된 감탄을 했을 터이다. 어째서 이 특별 할 것도 없는 이 사람의 한문 소설이 내 눈에 다시 띄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와서 새삼 감동과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아마 어른들의 이런 눈으로 교과서에 실렸을 테지.
신간 <국어시간에 고전 읽기>시리즈로 나온 이 소설집은 표지만으로 날 유혹하기 충분했다. 한 눈에도 풍자적인 연필화로 옛 이야기의 즐거움을 시시하지 않게 전해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렴풋이 박지원의 이야기가 재미 또한 갖추지 않았었나 해서, 선뜻 집으로 모셔온다. 옛말도 많고 한문 소설을 옮긴 것이라 현대 소설만큼 쓱쓱 넘어가진 않았지만 그에 견주어도 비기지않을 매력이 넘쳤다. 오히려 이백녀년 전의 이야기가 근래의 것보다 더 신선하게 느껴지는 필치는, 책의 소개대로 뛰어나고 남달랐다. 또 익히 알고 있는 호질이나 양반전의 원문을 보고 되새기는 과정이 유익하게 느껴졌다.(도데체 어디에 유익한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교과서의 내용은 두겹 세겹의 원문을 벗겨낸 것이다. 사실 더욱 복잡한 풍자성이 깃들여 있다는 걸 알게되는 순간 그의 재주와 지혜에 이제서야 진심으로 응하게 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단편소설집쯤 되는 이 책은 아기자기한 재미는 물론이고 풍자및 과장법의 다양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으니 누구든 한 수 배워도 좋을 것이다. 글과 글 사이에 시대적 배경까지 간결히 곁들여 있어 이해하기가 수월하다.
"...무릇 저잣거리에서는 이득이냐 손해냐 하는 것으로 사람을 사귀고 얼굴을 맞대고는 아첨으로 사람을 사귀지 않느냐! 그래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세차례 손을 벌려 청하면 누구나 멀어지게 되고 , 아무리 묵은 원한이 있어도 세차례 도와주면 누구나 친해지기 마련이지. 그러니 이득과 손해로 사귀면 오래 가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어도 오래 갈 수가 없다네. 커다란 사귐은 꼭 얼굴을 마주해야 할 까닭이 없으며, 아름다운 벗은 꼭 가까이 두고 지낼 까닭이 없지. 다만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하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의로 사귀는 길일세. 으뜸 벗은 천고의 옛사람과 사귀어도 아득하지 않고,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살아도 멀어지지 않는다네." (예덕선생전)
그의 말발이 대단하지 않은가. 시대를 아우르는 사유가 곳곳에 넘치니 시간 많으신 분은 옛글이라 폄하말고 읽어보시기 바란다.
하하 재미있게도 이 책은 중 고등학생들을 위한 도서로 기획되었는지 책의 마지막에 연습문제 같은 것이 있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또 박지원에 대한 마지막 평가에 조금은 놀라서 소개할까 한다.
우선 박지원은 그의 눈앞에서 역사의 주인으로 떠오르고 있는 백성의 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을 조선 왕조의 집권 양반에게 찾는 것이 지나친 바램이겠지만, 박지원같이 뛰어난 사람에게서조차 그런 자취를 찾을 수 없으니 안타깝스니다. 이미 보잘것없는 백성들까지 한글로 온갖 삶을 담아내고 있었으나, 박지원은 끝까지 한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한문에만 매달려 왕실과 양반 쪽에 서서 흔들리는 세상에 대한 걱정을 소설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