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신화 - 그림에 깃든 신화의 꿈
황경신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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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대한 미천한 지식 때문에 문학이나 미술에서 간혹 난적을 만난 기분이었다. 예술은 점점 해석되길 거부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러겹의 베일이라도 벗겨야 '느낌'에 가까워진다. 그런 점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허투루가 아니다. 

신화의 가장 큰 난제는 누가 뭐래도 신들의 이름이다. 예를 들어 나르시시즘[각주:1]이라는 말을 만들었다는 나르키소스는 강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는 것으로 단어의 뜻을 통비유 하고 곧 어원이 된다. 들은 풍월은 그나마 낳지만 수많은 자식을 낳은 제우스나 헤라같은 1세대 신들의 경우 계보라도 한 장 만들어서 '공부'하고 싶을 정도로 친자 관계가 복잡하다. 묘한 학습의 압박에 두터운 신화책에 손을 댔다 관 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공부는 언제나 내일로 미루는 법. 그래서 여태까지 밀린 신화 숙제에 산뜻한 에피타이저가 필요했다. 황경신의 <그림같은 신화>는 '그림에 깃든 신화의 꿈'이란 부제로 식욕은 돋운다. 
머릿 속에 계보의 거미줄을 얽을 필요도, 상징의 탈을 벗길 필요도 없는 '당신이 나의 신화가 되고 내가 당신의 신화가 된다'는 일 대 일 학습법^^이라고 해두자. 사랑, 욕망, 슬픔, 외로움 이라는 네 가지 감정에 따라 분류된 열 여섯 개의 신화 이야기는, 현대인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감성적 코드를 읽어낸다.

이 책의 강점은 이런 감성적 접근에 있다. 사랑의 핑크와 우울의 보라빛 이야기들을 모아 황경신만의 묘한 색깔을 낳았다. 그저 그런(사랑, 욕망, 슬픔, 외로움)이야기들을 선별한 작업이 아니다. 때론 신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때론 조연의 시선을 통해 굳게 닫힌 신화의 문을 스르르 연다. 이미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신화를 인용하고 패러디하고 주제 삼아 왔다. 인간의 운명에 빗댄 신화가 한편 너무 묵직하기도 했었다. <그림같은 신화>에도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는 바, 특히 중세에는 신화를 바탕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매우 많았다. 그 그림들이 여전히 현대인과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새삼스러웠다.
이제 정지된 그림이 이야기에 곁들여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기 시작한다.

미노타우르스의 출생 배경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 책 때문이다. 반인 반수의 괴물이며 영웅담의 조연으로 몇 번 등장한 것을 제외하고는 더이상 아는 것도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조지 프레더릭 와츠의 [미노타우로스](1885)란 그림에 부연된 글에서 저자의 상상력이 지닌 깊은 감수성을 경험했다. 죽는 용도로만 태어났던 한갖 '괴물'에게서 예술가와, 신화에 깊숙히 발을 넣은 사람만이 변방의 아우라를 발견한다. 미로에 갖혀 먼 곳을 응시하는 저 눈에서 볼 수 있는 건, 미노타우르스란 요물이 아니라 수치스런 짓을 감추려는 비밀이라는 괴물이다. 
 
저자는 <페이퍼>라는 잡지의 편집장으로 사랑에 대해 잘 알것 같다는 주위의 평을 듣는단다. 신화 속에서 사랑이야기를 건지는 솜씨가 그럴 법도 하다. 오히려 저자는 사랑에 대해 잘 모르니까 끊임없이 탐구하는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런 사랑의 탐정이 신화의 사랑이야기에 주목한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가히 인간을 압도 하는 신들의 사랑은 의심, 질투, 소유, 욕망의 세속적인 감정들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사랑을 쟁취하는 신들의 세계는 즉물적이다. 초식성 남자[각주:2]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우리는 사랑의 겁쟁이가 되버렸다. 그들의 육식성이, 부제가 말하듯 일종의 우리가 잃은 '꿈'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낭만 보다 깊은 사색에 빠져본다.

고등학교 때 처음만난<페이퍼>라는 무광택 종이 잡지의 신선하고 감각적인 느낌이 저자의 손을 거쳤다고 하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신화의 복잡한 미로를 따라가자면 조지캠벨의 <신화의 힘>이나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낳다. 하지만 신화에 입문하고자 하거나 그 어떤 이유로 신화에 대해 잃어버린 호기심을 되살리고 싶다면 저자의 그림편지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읽는 것보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우리의 기억력을 몇 배로 향상시킨다고 한다. 보고 읽으면서 이제야 좀 들은 풍월로 또 다른 신화의 문을 열고 싶어진다.       



 



  1. narcissism; 자기 사랑,자애(自愛), 이기주의,자기중심주의, 자기 도취증 [본문으로]
  2. 초식성 남자의 주요 특징은 연애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낀다는 거죠. 매너가 좋지만 나쁘게 말하면 선이 분명한 사람. 자기 코드가 분명하고 일과 취미에 대한 욕심도 있고, 친구도 많고, 감각도 좋고 등 한마디로 이미 자기 생활이 바쁘고 충만하기 때문에 굳이 애인에 목매지 않는 겁니다. -한겨레 신문에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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