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에 대한 글은 아니다.

연필로 글을 쓰는 몸이 바라보고 살아낸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연필은 글을 만들어내는 형식이자 조건이고 몸이다.

그러한 몸을 자각하는 의식의 표상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연필은

이 책의 전부라 해도 과언 아니다.



필압을 주지 않으면 흑연 입자는 종이 위에 밀착하지 못하고 달뜬다.

김훈 선생 문장의 밀도는 읽는 사람에게도 꾹꾹 눌러읽기를 요구한다.

느리고 느리다.

즐겁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고 단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세를 고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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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과 싸우다>

 

 

김사인이라는 시인이 있다. 김사인이라는 시인을 좋아한다고 표명하고 다니는 것만으로 하느님이 날 쫌 좋게 봐주셨으면 싶은 마음이 드는, 내게는 그런 시인이다.

그의 시들은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가녀린 타자들을 나라는 존재 안쪽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그것은 결코 대상화될 수 없는 기이하게도 가까운 풍경이며, 눈물로 이루어진 숲의 아름다움이다.

그 눈물의 끝은 육체적 소진에서 오는 자포자기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 가만한 존재들과 함께 나도 기어기 살아내 보자고 하는 윤리적 다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감히 김사인의 시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근래에 새로 나온 책들을 둘러보다가 기이한 제목의 시를 하나 발견했다.

김사인과 싸우다

도대체 어느 호로 시인(?)이 김사인과 싸우겠다고 덤볐단 말인가? 박신규라는 첫 시집을 낸 시인이다. (이런 하룻강아지 시인!)

이 시집을 읽은 한나절 내내 겨드랑이가 몇 번이나 떨렸다는 고은 시인의 추천 글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추천 글이 아니더라도 김사인과 싸운 시인이라면 꼭 한번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른, 우선, 장바구니에 담아둔다.

 

 

박신규 시인님, 면담 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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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

 

1.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2. 모든 길은 걸음의 흔적이다. 그리고, 흔적(痕迹)은 말 그대로 발뒤꿈치의 상처, 헌데를 가리킨다.

 

 

 

 

3. 그러면 누가 걷는가? - - - 그것은 상처받은 사람이다. 조금 더 정확히는, 상처를 받은 탓에 세계가 세속이라는 미로(迷路)로 바뀐 사람을 말한다. 내 오래된 명제를 반복하자면, 당신들은 이동하지만 상처받은 사람은 걷는다.

 

 

 

 

4. 풍경을 벗기면 벗길수록 죄가 솟구치는 자리에 뭔지 모를 것이 끊어져 자리라고 할 수 없는 자리에

 

그 짐승 같은 시간들을 밀지 못해서 잡지 못해서

 

살이 붙어 흉이 많다

 

 

 

 

5. 지상의 내 발걸음

어둡고 아직 눅은 땅 밟아가듯이

늦은 마음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출처>

1. p.5 풍경과 상처(김훈/문학동네/1994)

2. p.190 산책과 자본주의(김영민/늘봄/2007)

3. p.25 상동

4. p.90 순정, 바람의 사생활(이병률/창비/2006)

5. p.43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윤후명/민음사/1992)

    

 

 

 

 

 

 

* 길 위에 피딱지가 앉았다. 그 피딱지는 내 발뒤꿈치를 덮고 있는 상처에서 연원한다. 흉이 많은 발이 부끄럽다. 아직 이 어둡고 눅진한 땅을 떠나지 못한다, 나는.

어깨를 쳐 돌아보면 바람과 낙엽과 귀신의 장난질이다. 이렇게 가을은 가도 좋은가.

네가 오지 않았는데, 벌써 문이 닫히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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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 아야코와 거리를 둔다

 

 

 

 

 

 

얼마 전에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접했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라는 에세이를 쓴 소노 아야코라는 일본 작가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아베 정권에 자문역도 했던 극우 인사라는 내용이었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371039

 

 

평소 일상생활에 주는 지혜로운 말씀같은 가벼운 에세이는 전혀 읽지 않는 편이라서 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그다지 관심 없이 흘려보았던 책이다. 그러나 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제목은 꽤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하얀색 수영모를 쓴 여성이 무릎을 높게 들어 올리면서 물속을 보행하는 일러스트의 표지는 꽤 상큼하고 제목과 잘 어울려서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은 꽤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다. 알라딘 검색 결과에 의하면 에세이 주간 7, 세일즈 포인트는 무려 82,828점이나 된다.

 

 

대한민국에서 잘 팔리는 책이 일본 극우 인사의 작품이라니 꽤 흥미 있는 지점이다. 글이란 결국 자기표출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진대 이 기사가 나기 전까지 1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그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번에 자료를 조사하다가 특별히 마음 심란한 사실 하나도 알게 되었다. 내가 지난번에 포스팅 했던 오에 겐자부로는 극우 인사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글을 써서 평생 테러 협박에 시달렸고 법정에 서는 일까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오키나와 노트사건인데 이 책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전쟁 말미 일본군이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집단 자결을 강요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오에는 당사자로 지목된 이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게 된다. 이때 맨 처음에 나서서 오에의 책이 부실한 취재와 왜곡으로 얼룩져있다고 주장한 이가 바로 소노 아야코이다. 이쯤 되면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나는 작가=작품이라는 평면적인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작가가 어떠한 사람이든 일단은 작품을 보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편 가르고 규정하는 그 규율의 바깥을 보는 것이 문학일진대 어떻게든 쉽게 단정하기보다는 섬세한 결을 살피려고 노력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우선은 정나미 떨어진 마음을 살짝 한쪽에 밀어놓고 소노 아야코의 책을 한번 읽어보기로 했다. 그의 어떤 점이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도서관에 예약이 밀려있어서 빌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궁금해도 사서 보기는 좀 거시기하다.) 그래서 약간의 거리를 둔다대신에 조금 오래된 책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베스트셀러인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를 대출하였다. (이외에도 국내에 소개된 소노 아야코의 책이 매우 많아서 깜짝 놀랐다. 동네 도서관의 에세이 코너에만도 10권 정도의 책이 꽂혀있었다.)

 

 

 

 

 

 

2005년 우리나라에 소개된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일본에서는 이보다 훨씬 오래전인 1972년에 발표되어서 초장기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원제는 계로록 戒老錄인데 늙음을 경계하는 책정도로 번역이 되겠다. 본문의 내용을 보아도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보다는 나는 이렇게 늙고 싶다정도가 더 원래 뜻에 가깝다고 하겠다.

우선, 목차를 일부분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남이 주는 것’, ‘해주는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

남이 해주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일단 포기할 것

노인이라는 것은 지위도, 자격도 아니다

가족끼리라면 무슨 말을 해도 좋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고통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생애는 극적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한가하게 남의 생활에 간섭하지 말 것

다른 사람의 생활 방법을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할 것

푸념을 해서 좋은 점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명랑할 것

삐딱한 생각은 용렬한 행위, 의식적으로 고칠 것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하려고 노력할 것

 

      -  -  -  -  -  -  -  -  -  - 

 

 

어떤 사람에게는 하품이 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격언에서 감동을 얻는 사람이라면 가끔 읽어보면서 마음을 다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자신의 생애 단계에 맞춰서 노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어떤 나이 대에 대입해도 옳은 말들이다. 각 꼭지의 전개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이런이런 노인들이 있다(내가 보았다). 그러한 자세는 이러이러해서 좋지 않다(남우세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이러이렇게 나이를 먹어갈 일이다.’ 옛 경세서들의 간략함을 따르려고 한 듯하다.

 

 

그런데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서지 정보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1972년에 노인이거나 노인에 막 접어들려고 하는 나이였다면 도대체 지금은 몇 살이라는 건지 잘 계산이 되지 않았다. 책을 쓸 때 55세나 60세 정도 되었다고 하면 지금 벌써 100세가 훌쩍 넘었다는 소리인데 .... 어라~~ 1931년생, 그리고 출판년도가 1972년도. 그러니까 소노 아야코가 이 책을 낸 것은 자기 나이 41살 때의 일인 것이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고 앞서 읽었던 글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40대가 어떠한 나이 대인가? 머리가 굵어도 여전히 돈이 들어가는 자식들 뒷바라지가 힘겹고 예전 같지 않은 부모님을 바라보며 이별을 예감하는 마음은 졸아든다. 그 많은 책임감 앞에서 지금 일터에서 몇 년이라도 더 버틸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젊지 않다는 것을 매일매일 느끼지만 이 나이에 준비해야할 노년은 돈의 문제이지 아직은 마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하물며 잘 늙는 일에 대해서 꽤 잘 안다고 행세까지 하는 건 너무 건방진 일이 아닌가.

 

 

아무리 좀 옛날이라고는 하지만 일찍이 노령사회로 접어든 일본이고 보면 당시에도 41살의 소노 아야코가 노년에 접어들 나이로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책은 노년 당사자의 자기 성찰이 담긴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안의 노화의 기미를 채서 윗세대의 모습에 비추어 고찰해보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늙음은 어디까지나 관찰한 늙음, 남의 늙음인 것이다. 그런데 소노 아야코는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

 

 

 

p. 253

<노년의 고통이란 인간의 최후 완성을 위한 선물>

------------ (중략) ------------

그러나 인간은 행복에 의해서도 충족되지만, 괴로움에 의해서도 더욱더 크게 성장한다. 특히 자신의 책임도 아니며, 까닭도 없는 불행에 직면했을 때만큼 인간이 크게 성장하는 시기도 없다. 노년에 일어나는 이런 저런 불행도 바로 이러한 시련인 것이다.

만일 내가 그러한 불행을 젊었을 때 경험했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서 자살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40, 50, 60년 혹은 그 이상의 체험은 우리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마련한다.

 

 

 

 아직 겪어보지 않은 노년의 고통에 대해 소노 아야코는 이렇게, 겪어본 일처럼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노년의 고통은 신의 축복이니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고통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어서 남의 고통을 미루어 짐작하는 일은 반드시 어긋나거나 미치지 못하게 마련이다. 언젠가 겪을 경험이라 해도 아직 겪지 않은 자는 그 고통의 면면을 알 수가 없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무력감,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무엇보다도 당장의 빈곤. 그 높은 노인 자살률이 시련을 성장의 동력으로 바꾸지 못한 무능력 때문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앞에서 겸허해야만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그럴 줄 아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는 경계하는 마음만 있고 헤아리는 마음이 없다. 모든 걸 쉽게 판단하고 쉽게 단정 짓고 쉽게 훈계하는데  옳은 소리만 넘치고 그런 결론에 이른 마음의 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책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 같다. 글이 자못 담박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4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소노 아야코의 다른 책들은 좀 달라졌을까? 내가 살아보며 얻은 몇 안 되는 진리 중의 하나는 늙은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글이란 어떻게든 글을 쓴 이의 정체를 드러내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소노 아야코에게 가졌던 궁금증을 내려놓는다. 대신에 (일본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런 작가의 책이 십수 종이나 번역되어 나올 정도인 대한민국이 궁금하다.

 

소노 아야코와는 거리를 두려고 한다.

 

 

 

 

 

덧붙임 : 약간의 거리를 둔다의 원제는 人間分際이다. ‘인간의 분수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니 분수를 알아라할 때의 그 분수이다. 조금 시니컬하고 꼰대 같은 인상이 드는 것이 계로록 戒老錄과 뉘앙스가 비슷하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로 제목을 바꾼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표지 그림을 포함해서 우리나라 출판사의 마케팅은 주목할 만하다.

    살펴보니약간의 거리를 둔다』이후에도 같은 출판사에서 두 종의 책이 더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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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07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는 <약간의 거리를 둔다>를 읽고, 정말 별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자기가 쓰기 어려운 것을 쉽게 단정하고 자기가 쓸 수 있는 것에는 별 게 없는 작가였군요. 저도 거리를 두어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풀꽃놀이 2017-11-07 11:17   좋아요 1 | URL
오에 겐자부로와의 이야기에 완전 빡쳐서 어쩌면 저도 좀 선입견을 갖고 봤는지도 모르겠다 했는데...역시 <약간의 거리를 둔다>도 별게 없군요^^ 글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확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cyrus 2017-11-07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출판사는 일본 작가에 대한 사전조사나 검증없이 책을 펴내는 것 같아요. 판매수익을 올릴 수 있다면 작가의 이념은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가 봐요. 《우동 한 그릇》의 저자는 이미 오래전에 일본 내에서 사기꾼으로 들통났는데, 우리나라에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거예요.

풀꽃놀이 2017-11-07 15:38   좋아요 1 | URL
기사에서 보면 출판사 리수의 편집자는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 하네요. 하지만 2~30년 전도 아니고 지금 세상에선 변명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우동 한그릇‘의 저자는 맥락이 좀 다르긴 해도 아예 프로필이 범죄자인 인물이지요. 아직도 그 책이 왜 그리 팔렸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시이소오 2017-11-07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약간을 읽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군요. 대표적인 여자꼰대군요.
좋은정보 주셔 고맙습니다^^

풀꽃놀이 2017-11-09 18:37   좋아요 0 | URL
여자꼰대...동감입니다~~^^
 

 

 

* 이 글은 다른 곳에서 마주한 같은 이름들. 그 때문에 빚어진 오해와 이해에 대한 궁시렁거림이다.

 

    

* 이 미쓰비시는 그 미쓰비시가 아니었다!’

 

나이를 먹어서까지 나잇값을 못하고 연필 냄새에 깊이 탐닉하던 나는 얼마 전부터 연필 덕후로 커밍아웃을 하고 연필 카페에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미쓰비시라는 일본 필기구 회사가 있다. 거기서 만드는 하이엔드급 연필들은 높은 품질로 아주 유명하다. 그럼에도 내가 최근까지 미쓰비시 연필을 써보지 못한 이유는 그 바디에 찍혀있는 선명한 다이아몬드 로고 때문이다. 악명 높은 미쓰비시사의 쓰리 다이아몬드 로고.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제품을 팔아줄 수 없다면서 문방구에서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돌아서기가 여러 번, 호기심과 소소한 역사의식 사이에서 늘 딜레마에 처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이 미쓰비시는 그 미쓰비시가 아니었다!’ 연필을 만드는 미쓰비시 연필주식회사는 전법기업인 미쓰비시 중공업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기업이라는 것을 최근 연필 덕후질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이름과 로고가 같은 것도 어디까지나 우연. 재벌인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한때 미쓰비시 연필주식회사를 합병하려고 했다는 설도 있으나 어쨌든 사업 영역이 겹치지 않는 관계로 지금까지 같은 상표를 써오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같은 이름에서 비롯된 하나의 오해는 행복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맘고생(?)을 보상하듯 미쓰비시 연필들을 잔뜩 지르는 것으로.

 

 

 

 

 

* 얼마 전 새로 나온 책들을 검색하니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풋볼이 새 단장 되어 나온 것이 눈에 띄었다. 젊은 시절 한때 탐닉한 적이 있는 작가라서 가끔 새 책이 나오면 매우 반갑다. 탐닉은 했지만 지금에 와서 별로 한 마디 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 함정이면 함정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매우 난해한 관계로) 그래도 일본 제국의 변두리인 자기 고향 시코쿠의 역사와 신화에 천착하고,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과정의 긴장에 주목함으로서 중심의 중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알다시피 매우 난해한 관계로) 그의 작품세계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굳이 반핵 운동이나 평화헌법 9조를 지키는 활동 같은, 작품 외적인 모습 등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새삼 만엔 원년의 풋볼의 번역자가 박유하인 것이 눈에 딱 띠었으니..... 박유하, 박유하....눈에 익은 이름. 제국의 위안부의 그 박유하?? 왠지 모르게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알라딘을 검색해보니 맞다!

 

이 박유하는 그 박유하가 맞았다!’

 

찾아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고려원판 만엔 원년의 풋볼도 박유하 번역본이다. 그것이 2007년도에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다시 출간되고 올 4월에 동일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온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오에 상의 책들을 찾아보니 이외에도 아름다운 에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익사가 박유하의 번역이다. 둘 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고 아름다운 에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제국의 위안부가 문제되기 이전에 나왔지만 익사제국의 위안부의 삭제개정판이 나온 것과 같은 해인 2015년에 나왔다. 그 외에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인생의 친척도 같은 이의 번역이다. 박유하는 소세키 전문가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에 겐자부로의 책도 네 권이나 번역을 한 것이다.

 

그래서...그래서...

찜찜하다.

오에 겐자부로와 박유하라는 조합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내 책꽂이에 꽂힌 박유하가 번역한 책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마치 이 미쓰비시를 그 미쓰비시로 오해하고 있을 때 연필에 박힌 쓰리 다이아몬드 로고가 몹시 불길하게 내 눈에 들어와 박히던 것처럼.

 

 

 

 

* 얼마 전 제국의 위안부2심에서는 명예 훼손 혐의에 대해서 유죄가 선고되었다. 당사자인 박유하 교수는 일관되게 억울함을 말한다. 이것저것 검색해보다가 구명을 위한 거점인 것으로 보이는 박유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구구절절이 오해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오해일까 라는 의심이 강하지만 (그의 해명들이 내 눈에는 자꾸만 텍스트와 텍스트 행간 너머에 존재하는 유령과도 같은 의도를 소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함부로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참에 도서관에서 제국의 위안부초판을 빌려서 읽어봐야겠다.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등도 같이 찾아 읽어봐야겠고.

그러나 저자인 박유하 교수가 더 이상의 삭제를 거부함으로써 이 책이 자발적 금서가 될 위기에 놓인 것은 매우 유감이다.

 

 

미쓰비시에 대한 나의 오해는 오해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 그러나 박유하에 대한 오해는 오해로 결말이 날 수 있을까? 덕분에 내 책장의 한쪽이 매우 불길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불길함을 내 책장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받아들일 것이다. 가끔 한 번씩 째려보기는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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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04 1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쓰비시 연필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어요. 고려원에 나온 오에 겐자부로 전집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저는 《동시대 게임》만 가지고 있어요. ^^

풀꽃놀이 2017-11-04 20:21   좋아요 1 | URL
전집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구요...저도 중고 끝물에 한권한권 모은 것입니다. 많이 모으지는 못했습니다^^

닷슈 2017-11-10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흐비시볼펜도무관하겠죠?

풀꽃놀이 2017-11-10 20:59   좋아요 1 | URL
네~~ 볼펜도 미쓰비시 연필 주식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입니다^^

닷슈 2017-11-10 21:04   좋아요 0 | URL
다행이군요 그걸 애용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