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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고래와 돌고래에 관한 모든 것
애널리사 베르타 지음, 김아림 옮김 / 사람의무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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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명은 유식해보이기 위해서 쓰는 게 아니다>

 

 

 

최근에 고래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 기사를 검색하다가 올해 초 국립수산과학원에서 우리나라에 서식하지 않는 외국 고래 52종의 국명을 확정 발표한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37종의 국명은 이미 2012년에 발표되었다.

 

고래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생물학을 연구한 애널리사 베르타가 세계 고래 90종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고래도감이다. 2016년에 번역되어 나온 책이다. 따라서 올해 발표한 표준 국명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한번 대조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단박에 난감한 상황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 책은 국명 아래에 학명을 표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조금 이상하다. 예를 들면 대왕고래의 학명 Balaenoptera musculus’를 한글로 발라이노프테라 무스쿨루스라고 적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학명 인덱스만 제대로 붙어있으면 찾아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인덱스조차도 철저한 한글 사랑을 실천하고 있으니 (눈물이 난다!) 국명과 한글 표기 학명의 짬뽕 인덱스이다. 찾아보려고 하면 한글로 일일이 또박또박 옮겨 읽어가면서 찾아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수산과학원이 꼬마부리고래라고 명명한 ‘Mesoplodon peruvianus’는 한글로 메소플로돈 페루비아누스라고 옮겨서 인덱스에서 찾아야한다. ‘꼬마부리고래를 이 책에서는 난쟁이부리고래로 옮겨놓아서 '꼬마부리고래'라는 국명으로는 찾을 수가 없다.

 

 

이 책은 조판이나 그림이나 내용 설명이나 모두 꽤 공을 들여서 잘 만들었다. 게다가 제대로 된 고래도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고래도감이기도 하다. 그런데 학명이 제대로 기재되지 않아서 쓰임새에 제약이 있으니 매우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대왕고래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Balaenoptera musculus’ 라고 하는 것은 학자연하는 악취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학명을 표기해주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대왕고래와 일본의 시로나가스쿠지라가 동일 생물종임을 알 수가 없다. 대왕고래에 대해서 좀 더 심도 있는 정보를 알아보려고 해도 대왕고래발라이노프테라 무스쿨루스가 아니라 Balaenoptera musculus’ 라고 검색해야 세계 여러 나라의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이 비록 일반인을 위한 대중서라고 해도 Balaenoptera musculus’ 라고 표기해 주는 것이 맞다.

 

 

(게다가 학명에는 명명자가 이 종의 어떤 특징에 착안해서 이름을 붙였는지를 알려주는 소중한 정보가 들어있다. '페루부리고래'로도 불리는 꼬마부리고래는 학명에 ' peruvianus’가 들어있는 것만 보아도 '페루'에 '사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페루비아누스'에서는 그 사실을 유추하기가 어렵다. 대왕고래의 학명에 들어있는 musculus’는 대왕고래가 근육질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해주지만 '무스쿨루스'는 그저 의미없는 음운의 조합일뿐 그런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린네가 명명법을 창안한 이래로 알파벳으로 학명을 병기하는 것은 생물학 분야에 있어서는 ABC에 속하는 기초이다. 그런데 이 책은 어쩌다가 이것을 한글로 적는 무리수를 두게 되었을까?

어린이들 중엔 기나긴 공룡의 학명을 줄줄이 외우는 공룡 마니아들이 있다. 공룡이야 한국 표준 종명이랄 것이 없으니 그냥 학명을 한글로 적어서 이름 붙인 것을 보고서 외워 부르는 것이다. 고래도 아이들이 좋아하기로는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동물이니 어린이들이 널리 외우기에 편하라고 고안한 배려일까? (그러니까 어린 백성을 어여삐 여겨서?)

 

 

학명은 외워서 잘난 척 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언어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버린 인류가 바벨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마련한 하나의 이정표일 뿐이다.

잘 만든 책의 옥의 티가 커서 속이 상하다.

 

 

 

 

 

 

* 덧붙임 : 이 책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고래도감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더 커졌다. 우리나라의 관심종인 귀신고래 같은 종이 이 책에는 빠져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한국계 귀신고래는 멸종이라도 된 듯, 이름처럼 귀신같이 사라져버려서 오랫동안 우리나라 연구진들을 애태워왔다. 그러다 몇 년 전 귀신고래의 다른 개체군인 캘리포니아 귀신고래와 함께 생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관찰 결과가 나와서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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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09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래 책을 읽으시다니 흔치 않다, 싶어서 눌러 보니 인기 있는 고래 책이었네요. 저도 좀 넓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풀꽃놀이 2017-11-09 07:06   좋아요 0 | URL
다른 생물에 비해서 고래에 대한 관심이 좀 높은 편이고 워낙 잘 만든 책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도감이라 통독에는 무리가 있고 나중에 다른 고래 책이랑 엮어서 한번 보심이...
저요? 저는 워낙 도감류를 좋아하는 마니아랍니다^^
 
Ici au loin : Photographies 1964-2011 (Album)
Pentti Sammallahti / Actes Sud Editions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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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고요하고 충만한 세상이여
여기, 저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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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아무도 보아주지 않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곳
누가 너를 이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
같은 얘기를 목이 쉬게 같은 길을 발이 부르트게
걸어도, 벽이 높아서 나는 오를 수밖에 없어
차갑게 퍼붓는 비보다 마음 속에 내리는 비가
나를 떨게해, 이제 앞엔 떨어지는 길만 남은 걸까

바래왔던 건 아주 작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따스한 집에 돌아가는 것
바래왔던 건 아주 작은, 땀방울의 소중함을 알고
아름다운 미소를 알며 따스한 네게 돌아가는 것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오지은 3집>>


https://youtu.be/gSfmk9Ar3Fo

*


인간 존엄성이 바닥에 내쳐지고 짙뭉개질 때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오른다.
지상에서 거처할 공간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하늘 가까운 곳으로 오른다.
공부기계로 전락해 꿈을 잃은 아이들이 아파트 옥상에 오르고
하루 아침에 일터를 빼앗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타워크레인에 오른다.

1월 20일이다.
7년 전 용산 남일당 망루에도 그 높은 곳에 오른 사람들이 있었다.
6명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감옥에 갔다.
당시 살인진압에 나섰던 공권력은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고 최소한의 사과조차도 없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진압 책임자는 국회의원이 되려고 선거에 출마한다고 한다.

이 부도덕한 국가권력 하에서 작년에도 한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의식불명이 되었다.
역시 사과도 책임자 처벌도 없었다.

누군가가 또다시 외로이 망루에 올라 죽어가지 않게 하려면
우선 물어야한다. 무엇이 그들을 저 높은 곳에 오를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는지...누가 그들이 깃들 장소를 빼앗고 몰아냈는지...물어야한다. 집요하게 물어야만 한다.
그러나...지금 우리는...
어떤가?


*


인권은 공간을 이미 품고 있다. `인권의 사각지대`는 단순히 은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공간에서, 공간을 통한, 공간/장소를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몫 없는 자`가 외치는 몫은 자리이고 장소이고 공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훌륭한 도시 계획으로 모두를 위한 공간을 만들거나, 모두의 의견을 듣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공간을 기획하거나 하는 이야기와 다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몫 없는 자`가 요구하는 몫은 기존의 틀 안에서의 분배가 아니라 다른 틀이다.
- - - - -
인권이 실현되는 공동체에 대한 권리가 곧 인권이며, 이러한 정치공동체는 어떤 형식으로든 공간의 경계를 함축한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어디엔가 있다. 공간과 인권은 만나야 하며, 이미 만나고 있다. 공간이 인권을 안고 인권이 공간을 품어야 할 때다.
------pp94~95 <제 3장 누가 어디에 있나요?>, <<공간주권으로의 초대>>




*

지금..오늘..누가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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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강하고 시는 소멸을 향해 간다. 고도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화폐의 순환이라는 거대한 고리에 끼어들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옹호해야 한다.


`어떤 시`가 아니라 우선 `시`를 옹호해야 한다. 모든 것을 교환의 논리로 환원해버리는 자본주의의 폐단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용인이야말로 시의 종언을 알리는 타종이다. 시가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우리가 시에 요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에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해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꿈을 깨지 말라고 해야 한다. 그것 이외에는 우리가 시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시는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현실을 그려야 하고, 현실이 바뀐만큼 다른 풍경을 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것을 시에 요구할 수는 없다. 시가 변하기를, 시의 몸이 바뀌기를, 애플리케이션을 장착하고 다음 스테이지를 준비하기를, 소멸하지 않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시는 이미 소생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비관론을 체관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소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소멸할 때 하더라도 시는 이 세계의 `바깥`을 궁리해야 한다. 나는 그런 시를 옹호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강하지만 그래도 소멸을 향해 가고 있다. 이 시대에 적응해가는 시는 영원한 과거의 시에 머물 것이다.


나는 미래를 낳는 시를 옹호하고 싶은 것이다.


.....p. 43 <시적 환경의 변화와,
환경 부적응자의 이상한 옹호>



김현경씨의 「사람, 장소, 환대」를 읽고 난 참이라
「환대의 공간」 이라는 제목에 확 꽂혔네요.
시가 뭐에 쓰는 물건이냐고 이죽거리던 ` 그 녀석들`과
`시다운` 어떤 것, 변치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굳건히 믿으면서 오늘의 시들을 읽지 않는 분들께 들려드리고 싶은 말이지만...
아마 그 분들은 읽을 일이 없겠죠?

어차피 `시는 소생할 수 없는 운명` 이라는 발설을 듣고나니 외려 맘이 편해지네요.
그래, 나도 환경 부적응자다. 그래서...왜? 뭐...?!




누군가는 학창 시절 이후 처음 시를 읽었다며 하상욱의 시를 들이밀고
시를 읽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누군가의 카톡 상태표시란에 황인찬의 시구가 올라와있는 요즘,
예전만큼 시를 많이 읽지는 않지만
시에 대한 생각은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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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씨 2016-01-12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상욱의 시... 누구나 쉽게 접할수 있는 그런 형태의 시.
그렇게 맛을 들이면 좀더 깊은 시의 셰게로 발을 들일수가 있겠죠.
이 책도 궁금해집니다.
 

˝모든 것은 노래한다˝는 마치 ˝관찰의 인문학˝과 짝꿍같다.
한 동네를 새로운 시각으로 성실하게 관찰한 결과를 47장의 아름다운 지도로 보여준다.
길이나 번지수, 뒷골목을 나타낸 지도는 그렇다치더라도 대체 새둥지나 숲에서 보이는 하늘, 신문의 이동경로, 단풍색을 나타낸 지도를 무엇에 쓴다는 말인가?
추천사에 쓰여있는 말처럼 `한마디로 이 지도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지도는 세상을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여주지만` 진짜 `세상은 덧없이 빠르게 변해간다`.
그러므로 이 지도들은 다른 어떤 지도보다 `오히려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렇기에 매우 아름답다.
지도라기보다 차라리 시에 가깝다.

지도로도 시를 쓸 수 있다니 놀랄 일이다.
놀라고 있는 내게 저자 우드씨는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자기는 그저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받아적었을 뿐이라고.


*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저자 데니스 우드는 지도학자이다. 시인이나 민요수집가가 아니라.^^
참고로 표지 그림은 이 동네 보일런하이츠의 건물 층수를 나타낸 지도이다. 다시 강조하는데 저자는 지도학자이다. 추상화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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