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강하고 시는 소멸을 향해 간다. 고도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화폐의 순환이라는 거대한 고리에 끼어들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옹호해야 한다.


`어떤 시`가 아니라 우선 `시`를 옹호해야 한다. 모든 것을 교환의 논리로 환원해버리는 자본주의의 폐단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용인이야말로 시의 종언을 알리는 타종이다. 시가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우리가 시에 요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에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해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꿈을 깨지 말라고 해야 한다. 그것 이외에는 우리가 시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시는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현실을 그려야 하고, 현실이 바뀐만큼 다른 풍경을 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것을 시에 요구할 수는 없다. 시가 변하기를, 시의 몸이 바뀌기를, 애플리케이션을 장착하고 다음 스테이지를 준비하기를, 소멸하지 않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시는 이미 소생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비관론을 체관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소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소멸할 때 하더라도 시는 이 세계의 `바깥`을 궁리해야 한다. 나는 그런 시를 옹호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강하지만 그래도 소멸을 향해 가고 있다. 이 시대에 적응해가는 시는 영원한 과거의 시에 머물 것이다.


나는 미래를 낳는 시를 옹호하고 싶은 것이다.


.....p. 43 <시적 환경의 변화와,
환경 부적응자의 이상한 옹호>



김현경씨의 「사람, 장소, 환대」를 읽고 난 참이라
「환대의 공간」 이라는 제목에 확 꽂혔네요.
시가 뭐에 쓰는 물건이냐고 이죽거리던 ` 그 녀석들`과
`시다운` 어떤 것, 변치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굳건히 믿으면서 오늘의 시들을 읽지 않는 분들께 들려드리고 싶은 말이지만...
아마 그 분들은 읽을 일이 없겠죠?

어차피 `시는 소생할 수 없는 운명` 이라는 발설을 듣고나니 외려 맘이 편해지네요.
그래, 나도 환경 부적응자다. 그래서...왜? 뭐...?!




누군가는 학창 시절 이후 처음 시를 읽었다며 하상욱의 시를 들이밀고
시를 읽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누군가의 카톡 상태표시란에 황인찬의 시구가 올라와있는 요즘,
예전만큼 시를 많이 읽지는 않지만
시에 대한 생각은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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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씨 2016-01-12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상욱의 시... 누구나 쉽게 접할수 있는 그런 형태의 시.
그렇게 맛을 들이면 좀더 깊은 시의 셰게로 발을 들일수가 있겠죠.
이 책도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