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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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캐더의 [루시 게이하트]를 딱 절반 읽었다.

이제 조금 더 전개가 이어지다가 절정을 맞을 참이다.


절반 읽은 지점에서 잠시 책을 덮고

처음으로 돌아간다.


플랫강 유역에 있는 작은 마을 해버퍼드에서는 여전히 루시 게이하트 이야기를 한다.


9p


루시의 '부재'가 느껴진다.

떠났든, 죽었든.


절반의 결말을 내놓고 시작하는 첫문장이다. 



생은 계속되고 우리는 눈앞의 일상을 살아내야 하니까. 하지만 루시라는 이름을 언급할 때면 다들 낯빛이나 목소리가 은근히 밝아지며 허물없는 눈동자로 넌지시 말한다. '그래, 너도 기억하지?'


화자가 복수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다. 해버퍼드 마을 사람들.


이들은 이젠 떠나고 없는 루시를 떠올리며 낯빛이나 목소리가

은근히 밝아진다.


Lucy Gayheart.


'lucy'는 라틴어 'lux'가 어원이다.

그 뜻은 '빛'.


gay=lightheaded/carefree


심장이 밝은.


루시 게이하트.


빛의 밝음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그래서 전체 서사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이름이다.


마을 사람들(화자)과 함께 독자(나)는 루시 게이하트를 회고한다.

떠나지 않은 상태의 루시를 돌아본다. 

독자는 그녀를 만난 적 없으니 화자는 적극적으로 개입해 안내한다.

3인칭 관찰자 신분이면서 루시의 눈과 귀와 머리와 마음이 된다.

마음대로 그 내면을 들어간다.


뿐만 아니다. 

주요 인물인 서배스천, 해리의 마음 속에도 거리낌없이 들어선다.


윌라 캐더는 자유간접화법의 달인이다.

인물과 서술자의 목소리가 자유자재로 섞인다.

누가 인물이고 서술자인지 구분이 어렵다.

그 구분이 어렵다는 건 이 소설의 미덕이 된다.


3인칭이란 렌즈로 줌아웃한 거리감을 자유간접화법으로 바짝 당긴다.

한 발 떨어져 루시를 보면서도 어느새 루시가 되기도 한다.

(소설의 자유간접화법을 익히고 싶은 소설가라면 이 책은 고퀄의 텍스트북!)


절반까지 읽은 상태에서 '삼각 관계'를 한 번 들여다보자.


루시-서배스천-해리


루시는 무언가를 동경하는 시골 처녀.

서배스천은 위대한 예술가(루시가 보기에)

해리는 속물적인 부잣집 도련님


해리를 택하면 편안한 삶이 보장된다.

서배스천은 유부남이고 나이도 아버지뻘에 아는 건 노래밖에 없다.


루시는 서배스천에게서 예술의 열정을 본다.

루시가 동경하던 것의 정체다.


해리와 서배스천이란 남자는 모두 루시를 '통해' 무언가를 본다.


해리는 루시를 통해 자신의 취약성을 채우려 한다.

서배스천은 루시를 통해 청춘의 열정을 채우려 한다.


루시가 서배스천을 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서배스천은 이미 루시의 많은 것을 파괴했다. 어떤 사람들은 신변과 재산에 일어난 변화로 인생이 바뀌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감정과 생각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뿐이었다. 


서배스천은 루시에게 파괴자다.

이전 세상의 파괴자.


서배스천을 만나기 전의 루시는 낱말에 직접적인 뜻 외에 다른 의미가

깃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03p


서배스천은 루시에게 창조자.

낱말의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창조자.


파괴자면서 창조자.


서배스천으로 인해 루시의 이전 세계는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다.


인생에 이런 사람을 한 명이라도 만나는 건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다.


이런 사람 옆에 '사랑'이란 단어를 붙이는데 우리는 주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런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에 '사랑'을 붙이는 게 문제다.


물론, 루시에게 서배스천은 '비극'의 서막이었다.

많은 사랑이 그렇듯이.

어쩌면 진짜 사랑이 그렇듯이.


이들의 사랑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절반을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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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종류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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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다.

내게는 조르주 페렉이 그렇다.

내가 천재가 아니니 천재를 알아볼 길은 없다.

뭐가 천재인 지도 잘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런 게 '천재' 같다.


잘은 모르겠는데 그냥, 천재 같은 느낌을 주는...


옛 저택에서는 계단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오늘날의 건물들에서는 그보다 더 더럽고, 더 춥고, 

더 적대적이고, 더 인색한 것이 없다.


우리는 계단에서 더 많이 생활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문장을 보면 감응된다.

왜 좋은지 모르겠는데 무지 좋다.


책장을 넘기지 않고 글자를 노려보고 있게 된다.

거꾸로 읽어도 보고, 다시 돌아가 읽어도 보고, 

매직아이 그림 보듯 책장을 뚫고 그 너머도 보게 된다.


천재가 쓴 글인데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좋다.

대개, 천재들은 너무 난해하게 쓰는데.

페렉의 글도 난해하다.


이 말을 왜 하는지 모르겠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 짜증이 안 난다. 


먼저, 우리는 우편배달부와 함께 학교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앞도 뒤도 없이 이 맥락없는 문장이 이상하게 좋다.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다.

우편배달부와 함께 학교에 가기.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을 거침없이, 뜬금없이 떠드는데

이상한 사람이란 생각이 별로 안 든다. 


조르주 페렉과 같이 이상해지고 싶다, 차라리.

그럼 뭔가 굉장히 쓸데없는데, 사실은 굉장히 의미가 있고,

알고 보면 굉장히 괜찮은 걸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의 천재에게 기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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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와 베끼기 - 자기만의 현재에 도달하는 글쓰기에 관하여
아일린 마일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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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깨끗하게 책을 읽은 적이 거의 없다.

대개는 밑줄을 긋기 위해 손에 연필을 그러쥐고 책을 읽는다.

그래서 읽은 책은 대개 '걸레'가 된다.

메모도 숱하고 하고 뭘 그렇게 덕지덕지 붙이고 난리도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다 읽고 나서도 새책과 진배 없다.


밑줄을 하나도 긋지 못했다.

밑줄 그을 곳이 없다.


어쩌다 그을 뻔했다. 연필을 갖다 대고 잠시 있었다.

그런데 긋지 못했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밑줄긋기에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밑줄을 부르는 건 도드라진 문장이다.

독자적인 문장인 경우가 많다.


밑줄이 그어지지 않은 바로 앞 혹은 뒷문장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밑줄을 그으려고 할 때, 왜 하필 거기서부터일까?


그건, 그 문장을 따로 떼어놔도 괜찮아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앞뒤 문장과의 긴밀성이 끈끈하지 않을 때.

그냥 그 문장만으로도 말이 될 때.


"아니. 그냥."


이런 문장에 밑줄 긋는 사람은 별로 없다.

뭐가 '아니, 그냥'인지 앞뒤 문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는, '아니, 그냥' 자체보다는 '아니, 그냥'의 이유가 되는

다른 문장에 밑줄을 그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이 책에 밑줄을 긋지 못한 건...


독립적으로 따로 떼어놓기엔 앞뒤 문장과 맥을 끊을 수가 없어서다.

어디서부터 밑줄을 그어야 할지, 시작점과 끝점을 찾지 못했다.


그냥 한 페이지를 다 그어야 한달까.


그건 밑줄답지 않다.

밑줄은 어쩌다 그어야 밑줄답다.


한 페이지를 다 그어야 한다면 그냥 줄을 치는 것이지, '밑줄'이라 할 수 없다.


도드라져서 밑줄로 떼놓을 문장은 없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가 끈끈해서 한 챕터가 한 문장처럼 느껴지는 책.


그게 이 책이다. 


낭비와 베끼기.


이 책은 줄곧 낭비와 베끼기에 관해서 말한다.

그런데 읽다 보면 알 수 있다. 글쓴이는 낭비하거나 베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글쓰기를 그저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아일린 마일스가 '낭비하고 베낀' 글을 읽는 재미가 컸다. 


글은 이렇게 써야 하는 건데.

이런 게 문장이란 건데.


다음으로 읽을 책이 정해졌다.

아일린 마일스의 또다른 책은 번역본이 없다.

원서로 읽어야겠다.


설레라.


Chelsea Girls: A Novel


The Importance of Being Iceland: Travel Essays in Art (Semiotext(e) / Active Ag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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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과 기억
윤미애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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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말했다. 벤야민은 글을 너무 못쓴다고. 하나도 알아먹지 못하겠다고. 자고로, 글은 이해되어야 한다고. 과연, 그게 벤야민 탓일까. 독일어를 공부하고 싶다고 결심하게 만든 분. 독일어 정복에 실패했으니 그를 읽기 위해 이 책에 기대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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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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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되는 이들의 필독서. 우리는 무지한 스승을 욕해서는 안 된다. 무지한 스승의 ‘빈곳‘에서 배울 때, 준비되지 않은 ‘진짜‘ 배움이 가능하다. 스승이여, 다 아는척 설명하지 말길! 학생을 해방시킬 줄 아는 자가 진정한 스승이다. 가르치지 말고 끌어달라! 그렇게 스승은 무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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