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습니다. 봄이라고 하면 저는 왠지 단편이 땡깁니다. 예비군 훈련의 추억 때문인지도. 왜 하필 예비군 훈련이냐 하면, 군복 건빵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가서 틈날 때마다 읽기 좋기 때문입니다. 예비군 훈련 받을 때 읽기 좋은 봄에 읽기 좋은 단편집 몇 권 골라봤습니다.

 

 

 

 

 

 

 

 

 

 

 

 

 

 

 

 

1. 첫 번째 추천 작가는 안톤 체홉(체호프)입니다. '단편'이라고 했을 때, 에드거 앨런 포, 오. 헨리와 더불어 즉각 생각나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체홉은 장편도 썼지만 단편에서 최고 수준의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보코프 역시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체홉을 가리켜 장거리 주자라기보다 단거리 주자다, 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체홉 단편집은 아주 많은 판본들이 나와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보든 큰 상관은 없겠습니다만, 전집이 아니라 선집이기 때문에, 단편집에 따라 수록된 작품이 많이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실 필요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좋아하는) <상자 속의 사나이>라는 단편은 (다음 세 판본 중) 펭귄클래식 출판사본에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체홉의 단편이 마음에 드셨다면 세 개의 판본을 모두 구비해놓고 읽어나가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체홉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추천 작품은 사무엘 베케트의 <첫사랑>입니다. 베케트는 물론,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네 편의 단편이 실린 <첫사랑>도 읽어볼만한 작품집입니다. [문지스펙트럼 문고]로 출간되어 가볍게 지니고 다니며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제목은 물론, 내용도 (이의는 있겠지만) 왠지 봄과 어울린달까요.

'가볍게 지니고 다니며' 읽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책의 물리적 속성이 그렇다는 것일 뿐, 쉽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베케트의 소설이니까요. 하지만 쉽지 않다고 해서 재밌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또 쉽지 않다고 해서 쉬엄쉬엄 읽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써놓고 나니, 저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네요. 아마, 직접 읽어보시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지스펙트럼 문고]라고 하니, 플로베르의 단편 모음집인 <세 개의 짧은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3.. 세 번째로는 한국 작가의 단편집을 추천해봅니다. 따지고 보면 한국이야말로 '단편 강국'이기도 하지요. '신춘문예'라는 오래된 제도적 전통, 그리고 단편을 위주로 공모를 해온 문학계간지가 문단을 주도해온 덕택에 한국에서는 장편보다는 단편이 장려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플로베르가 한 것처럼) 오랜 기간 동안 문제 의식을 갈고 닦아 길고 묵직한 대장편을 쓸 수 있는 작가는 없고, 그때 그때 시의에 따라 순발력 있게 짧은 단편을 써내는 작가들이 대다수를 이루게 되었다는 비판이 지난 2000년대 중반부터 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한 비판의 결과로, 최근 들어 장편만을 공모하는 '장편 문학상'들이 제정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한국에서 단편이 주를 이루게 된 것은 식민지 시대부터라고 하니, 그 연원이 꽤 깊은 셈입니다('신춘문예'라는 제도 자체가 식민지 시기에 생긴 것이기도 합니다).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문학 작품들 역시 단편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르치기에도 좋고, 시험 문제 출제하기도 편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어쨌거나 여러 작가 중에서도 일찍이 단편 소설에서 최고의 성취를 보인 작가는 아무래도 상허 이태준이 아닌가 합니다. 이태준은 '단편 소설의 명수'로 불렸고, 체홉에 비견되기도 했습니다.

이태준의 단편은 <복덕방> <달밤> 등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 다시 읽은 <밤길>이라는 작품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4. 1930년대에 이태준이 있었다면, 1960년대에는 김승옥이 있었습니다. 네 번째 추천 작품은 김승옥 단편집입니다. '감수성의 혁명'이라 평가되는, 그야 말로 톡톡 튀는 단편들을 통해 60년대라는 시기, 그리고 당대를 넘어 한국문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인 김승옥은, 그 다재다능함으로 인해(영화 시나리오를 썼음은 물론 영화 감독까지 했습니다) 한국의 '장 콕토'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김승옥 소설전집은 총 다섯 권으로 나와 있는데, 1권에 주요 단편들이 모두 수록되어 있습니다. 2-5권에는 중, 장편과 콩트들이 실려 있습니다. 여유가 된다면 다섯 권 모두 봐도 좋겠지만, 김승옥 역시 체홉처럼 장거리 주자라기보다는 단거리 주자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1권으로도 충분합니다... 물론 <강변 부인> 같은 대중 소설도 읽어보면 꽤 재밌긴 합니다.

 

 

 

 

 

 

 

 

 

 

 

 

 

 

 

 

5. 일본 작가 중에서도 훌륭한 단편을 남긴 작가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유독 인기가 높은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집 역시 읽어볼만 합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아무래도 <인간 실격>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사양>과 같은 소설이나 단편들을 더 좋아합니다. 하긴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했던 것도 어느 덧 오래 전 이야기..... 네요. 개인적으로 다자이 오사무는 20대 초, 중반에 푹 빠져 있었던 작가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다자이 오사무는 '문학 청년(소녀)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데 최적화된 작가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김승옥 역시 청년기에 다자이 오사무를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학적 감수성'이란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미성숙'의 증거이기도 할 겁니다. 다자이 오사무를 읽다보면 문득, 뭐랄까, 내면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 ('감수성'을 앞세워) 마구 칭얼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른이 돼서 칭얼거리면 주변의 빈축을 사기 쉬위니, 다자이 오사무의 주인공들이 마구 칭얼대는 걸 읽으면서 대리만족하는 정도로 넘어가도 좋지 않을까...... 또는 아예 적극적으로 나서서, 마구 칭얼대는 와중에도 매력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비법을 다자이로부터 전수받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일본 작가의 단편집을 또 하나 고르자면, 아쿠타가와 상으로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집 역시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읽은 것은 다음의 판본(<월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 화폐 5000엔의 모델인 여류 작가 히구치 이치요의 단편집 <키 재기 외> 도 읽어볼 만 합니다.

 

 

 

 

 

 

 

 

 

 

 

 

 

 

 

 

 

 

 

 

 

 

 

 

 

 

 

 

 

 

 

 

6. 다음은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집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입니다. 고골의 단편은 19세기 초, 중반 무렵에 쓰여진 것들이라 '현대적인' 느낌이 조금 덜한 편입니다. 민담이나 우화의 요소, 환상적 요소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물론, 현대적인 느낌이 덜하다고 해서, 구닥다리 냄새가 나거나 공감대 형성이 어렵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마치 '외계의 것인 듯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단편들입니다. 게다가 언뜻 보기엔 굉장히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상상력인데, 조금만 읽다보면 작품에 훅 빨려들게 된다는 치명적인 매력을 갖추고 있기도 합니다. <코>, <외투> 등 유명한 단편들은 물론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와 같은 단편들 역시 훌륭합니다.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광인 일기>를 읽어보시면, 어떻게 그 당시에 이런 상상이 가능했는지 싶어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이렇게 여섯 권의 단편집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 그리고 읽은 것 위주로 소개를 해드렸기 때문에 리스트의 밀도가 헐겁습니다. (하긴 어떻게 뽑더라도 완벽한 리스트라는 게 존재할 순 없겠습니다만...) 가령 중국 작가 루쉰이나 미국 작가들의 단편은 아쉽게도 리스트에서 빠졌습니다. 혹시 루쉰에 관심이 있다면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루쉰 소설 전집>을 추천합니다. 또한 미국 작가들의 단편들을 쭉 훑어볼 수 있는 좋은 소설집으로는 창비에서 출간된 <필경사 바틀비 외>가 있습니다.

 

 

 

 

 

 

 

 

 

 

 

 

 

 

 

 

창비에서 나온 [세계문학 단편선]은 각 나라의 대표 단편들을 고루 접할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만, 대개 한 작가 당 한 편씩만 읽게 되어 있어서 감질맛이 나기도 합니다. 물론 관심이 가는 작가의 다른 단편집을 찾아 읽으면 되겠지만, 국내 출간이 아예 안 된 경우가 많아 그렇게 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 경우엔 [세계문학 단편선-미국편]에서 셔우드 앤더슨과 스티븐 크레인에 관심이 생겼는데, 셔우드 앤더슨은 다행히 단편집 <와인스버그, 오하이오>가 국내 출간되어 있으나 스티븐 크레인의 작품은 따로 출간된 게 없어서 매우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 아쉽다면 원서를 구해서 읽어도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봄에 가볍게 지니고 다니면서 읽는다'는 애초의 컨셉에 맞지 않는 달까요... 하긴 뭐, 루쉰 소설 전집도 이미 '가볍게 들고 다니며' 읽을 만한 두께와 무게는 아닙니다...

 

 

***

단편은 분량이 짧기 때문에 부담 없이 달려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마음을 놓고 읽으면 잘 소화, 흡수가 안 된다는 점! 잘 쓰여진 단편은 고농축, 고단백 음식에 해당하기 때문에 나름의 '식이요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소화불량, 영양과다를 피하려면, 하루에 몇 편을 연달아 읽는 대신, 한 두 편을 읽고, 내용을 천천히 곱씹어 보는 시간(=소화시키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이렇게 소개를 하는 와중에, 저는 그 동안 건성으로 한 두 편 씩 읽었던 체홉의 작품들을 하루 한 편 씩 읽어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개인적 욕심이 반영되어서인지 첫 타자로 소개를 했네요.) 그렇습니다. 왠지 단편은 가벼운 마음으로, 달리 말하자면, '건성으로' 읽게 되는데, 실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집중해서' 쓰는 것이 바로 단편이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도 집중해서 읽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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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알게 된 사실. 도서출판 b에서 다자이 오사무 전집을 총 10권으로 계획하고 출간 중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5권까지 출간되었습니다. 작품이 쓰여지고 출간된 시기 순이어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세계를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집 10권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권 <만년>, 제2권 <사랑과 미에 대하여>, 제3권 <유다의 고백>, 제4권 <신햄릿>, 제5권 <정의와 미소>, 제6권 <쓰가루>, 제7권 <판도라의 상자>, 제8권 <사양>, 제9권 <인간 실격>, 제10권 <생각하는 갈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인간 실격>일 텐데, 중단편들도 읽어볼 만합니다. '훌륭하다'고 하지 않고 그저 '읽어볼 만하다'고 한 것은, 글쎄요, 아무래도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가 작용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한국에서 '문학 청년(소녀)적 감수성'의 기본 형태를 주조한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르게 얘기하자면 '문학 청년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데 최적화된 작가, 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에 다자이 오사무에 푹 빠졌던 경험이 있는 이라면(드물지 않을 듯한데) 이 말에 공감하실 듯.

'문학 청년(소녀)적 감수성'은 '미성숙한 자아의 감수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주관적 감수성이 실제 세계와 실제 삶을 압도하는 경우를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이가 세계를 자기 위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나 입장보다는 내 존재와 입장이 우선이고, 또 절대적입니다. 요컨대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를 읽다보면 문득, 내면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 '감수성'(또는 순수함)을 앞세워 마구 칭얼대고 떼쓰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다자이 오사무는 20대 중반을 넘어선 이후로 자연히 멀어진 작가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다자이 오사무는, "내 순수함을 인정해주지 않는 이런 세계 따위 필요 없어. 죽어버릴 거야!"라는 태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세계에 대한 경멸이 깔려 있고, 죽음, 그것도 자살을 무기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물론 다자이 오사무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에둘러 표현합니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사과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전혀 사과로 여겨지지 않고, 칼날이 숨겨져 있는 듯합니다. 위악적입니다. 이런 식의 사과 아닌 사과는 받는 입장에서도 기분이 좋을리 없습니다. '인간 쓰레기'--자신의 작품 속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스스로를 그렇게 그려놓고 있습니다.

잘 타일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경우엔 이게 또 쉽지가 않습니다. 작품 자체가 발하는 고유한 매력이 있어서 읽다 보면 어느덧 설복당하기 십상이니까요. 가령 <동경 팔경>과 같은 작품에서는 항상 자살을 꿈꾸고 있는,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주인공이 그 '초긴장 상태' 속에서도 짐짓 여유를 부리며 주변 풍경을 둘러보는데, 그 묘사에는 놀랍게도 유머가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 자신을 동경의 명물 중 하나로 제시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까놓고 이야기 하기] 분야가 있다면, 다자이 오사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일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과도한 자의식'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미성숙한 태도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어른(요즘 유행하는 말로 '깨시민')이 된다는 것은, '나'라는 편협한 관점과 입장을 벗어나 '남'의 존재와 입장을 배려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우리는 배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상황과 입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고, 자기를 배려해본 적이 없는 이가 타인의 입장에 서보고, 타인을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내 입장 보다는) 남의 입장을 우선 배려하기'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 취하기'가 하나의 정언 명령으로 자리 매김된 요즘입니다. '개념을 탑재'해야(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여야)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 번의 말 실수나 행동의 실수로 '초딩(=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그러고 보면, '개념 탑재'가 하나의 강박이 되어 버렸다는 느낌도 듭니다. 하지만 편견과 고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요.

다른 성별, 다른 인종, 다른 종(동물), 그리고 지구와 환경. 이 모든 것을 배려하라는 명령들 속에서 우리는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를 생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갖가지 '개념들'에 의해 '감수성'이 질식당하고 있는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다자이를 읽으면 숨통이 트인다"는 독자들의 반응은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해서, 앞서 그저 '읽어볼 만하다'라고 썼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 '특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작가라고 수정해둡니다... (읽을 것들이 쌓여 있어 언제 전집을 읽을 시간이 날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중에서는 <인간 실격>보다는 <사양>이 좋았습니다. 단편집 <달려라 메로스>에 실린 단편들도 인상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위에 언급된 <동경 팔경>을 비롯하여, <후지 산 백경> <여학생>과 같은 단편들이 좋았습니다. 앞의 두 단편은 경치에 대한 묘사라는 공통점이 있네요. '자기 중심적 작가' 또는 '자기 자신의 (감수성에) 매몰된 작가'임에 틀림 없는 다자이 오사무이지만, 한가롭게 경치 얘기를 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자기 얘기가 빠지지는 않습니다.)

삶에 대한 답은 누가 대신 제시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각자 자신에게 절박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풀어가는 방법도 천차만별입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사회의 통념에 비춰볼 때) '바람직한' 방식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그는 아주 성실한 자세로 자신의 문제를(또한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에 천착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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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주문한 <모차르트>가 도착해서 읽고 있습니다.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쓴 평전으로, 부제는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입니다.

무려 '사회학적 고찰'이다 보니 읽는 게 마냥 쉽지 만은 않습니다. 어째서 '사회학적 고찰'이 필요하고 중요한지에 대해, 엘리아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개인적 운명, 유일무이한 인간이자 유일무이한 예술가로서 그의 운명은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 즉 당시 음악가들이 궁정 귀족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사례에서 우리는 사회학자들의 장인적 기술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한다면, 한 개인의 삶의 문제들을, 그의 인격이나 업적이 아무리 일회적이고, 비교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후세에게 전기 형식으로 이해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를 이루려면 그의 어깨에 지워졌던 사회적 강제를 명료하게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이 경우엔 18세기의 예술가가--자기 시대의 다른 사회적 인물들과의 상호의존성으로 인하여 만들어내는 결합태의 검증 가능한 이론적 모델을 완성해내는 일이다. (24-25)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어깨에 지워졌던 사회적 강제'에 대해 하나하나 서술하고 있습니다. 논의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모차르트는 천재였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사회는 아직 '낭만적 천재'의 개념을 몰랐다. 따라서 천재를 천재로 대할 줄 몰랐고, 천재에게 합당한 자리 역시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음악가들의 궁정에서의 서열은 '과자 제조공' '요리사' 또는 '시종'과 같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하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궁정 아첨꾼'에 해당했다, 고 엘리아스는 적고 있습니다. 때문에 '궁정 음악가'들은 그들의 '낮은 신분'에 맞게 "음악적 취향뿐만 아니라 의상이나 전체 인간적 특징에 이르기까지 궁정의 행동 규범 및 감정 규범에 맞춰야만"(26)했다고 합니다. 마치 승진 기회를 노리고 있는 대기업 직원이 상사의 규범에 맞게 행동(그리고 감정)을 조절하는 것처럼요.

말하자면 모차르트는 '천재 시대 이전의 천재'였던 셈인데,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모차르트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엘리아스는 쓰고 있습니다.

천재에게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줄 수 없었던 사회. 거기서 모차르트는 뭔가 공정하지 않음을 느꼈고, 분노를 터뜨렸으며,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에 대항하여 싸웁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종일관 개인적인 투쟁"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투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고 엘리아스는 또한 쓰고 있습니다.

베토벤과의 비교도 (짤막하지만) 흥미롭습니다.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궁정-귀족적 전통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반면, "베토벤은 이 전통을 박차고 나왔다"(48)고 서술합니다. 모차르트보다 15년 늦게 태어난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속박한 '궁정'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자유 시장'에서 '자유 예술가'로서 작업했으며, 자신의 음악적 환상을 일관성 있게 추구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음악 청중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할 수 있었다"(59)고 합니다. 물론 엘리아스는 이 ('자유 시장'이 보증하는 한 존재할 수 있는) '자유 예술가'상에 대해서도 비판적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오페라'들 역시 다음과 같은 맥락을 염두에 두고 보면 흥미롭습니다. 당시 오페라는 음악 장르 가운데 가장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인적, 재정적 자원이 필수였던 탓에 (여차하면 유랑 극단에 의해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던 연극과는 달리) 전적으로 궁정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49)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과연 신의 축복을 차고 넘치게 받은 천재일까요? 위대한 예술은 천재들의 전유물인 걸까요? 엘리아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술가의 착상(환상, 상상)은 (예술의) 재료 및 사회(특히 양자가 지니는 한계)와 연관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위대한 것으로 만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자발적으로 발휘한 '예술가적 양심'이었다고 말합니다.

좀 길지만 다음의 인용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술가의 착상이 재료 및 사회와 동시에 연관된다는 것은—첫눈에 그 관계가 명백하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결코 우연이 아니다. 각각의 예술 영역을 특징짓는 재료들은 무한히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예술가의 자의에 강하게 저항한다. 한 예술작품이 탄생하려면 개인의 환상은 이 재료들 중의 하나 속에서 재현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변형시켜야 한다. 예술가가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환상과 재료 사이의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환상은 형태를 가지게 되고 한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며 동시에 의사소통의 수단, 즉 반드시 예술가의 동시대인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타인들의 공감의 대상이 된다.

어떤 예술가도, 즉 모차르트조차도 힘 안 들이고 창작할 수는 없다. 모차르트의 음악에서는 강물처럼 흐르는 환상의 물결이 재료의 고유성과 거의 완벽하다 할 정도로 융화되어 있고 음의 형태는 오랜 기간 동안 놀라우리만치 가볍게 그의 의식 위로 떠올랐으며 그 음의 풍부한 독창성은 뛰어난 음 형태의 내재적 일관성과 무리없이 결합되어 있지만, 모차르트는 어떤 작품에서도 지켜보는 양심의 눈 밑에서 검토하고 개정하는 수고를 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훗날 "작곡하지 않는 것보다 작곡하는 일이 더 쉽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많은 발언이며 그 신빙성도 상당히 높다. 언뜻 보기에 이는 신의 은총을 듬뿍 받은 사람이 내뱉는 말쯤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어가보면 그것이 고뇌에 지친 인간의 고통에 찬 절규임을 알게 된다.

모차르트는 사랑받고 싶다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이 고통을 때론 장난기 어린 우아한 작품들을, 때론 깊이 심금을 울리는 작품들을 창조함으로써 극복하였다. 그가 이 작품들을 통해 추구했던 성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바로 지나치게 엄격한 그의 양심 때문이기도 하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재능을 의식하고 있었고 그 재능을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이 의무를 배반했더라면 한결 수월하게 지나갔을 경우에조차 그는 그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이 순전히 그의 결정만은 아니었다. 그를 그렇게 몰고 간 것은 부분적으로 자기 강제였지만, 다른 한편 하나의 결정이기도 했다. 모차르트가 별다른 자기 성찰 없이 자신의 예술가적 양심을 그가 필요로 했던 청중의 사랑과 갈채를 상실할 정도로까지 추구했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라도 그는 ‘한 인간으로서’ 후세의 감탄과 찬사를 받을 만하다.

모차르트와 같이 그토록 경이로운 인간의 인격 구조에 대한 간략한 언급은 인간 모차르트와 예술가 모차르트를 마치 별개의 두 사람인 양 나누어 말하는 습관이 자명성을 상실케 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과거 사람들은 인간 모차르트를 천재의 이상형에 들어맞도록 이상화하려 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가 모차르트를 일종의 초인으로, 인간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가벼운 경멸감을 가지고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에게 합당치 못한 평가이다. (88-90)

 

 


 
엘리아스의 <모차르트>는 그가 이전에 했던 작업들, 특히 <궁정사회>나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논의됐던 점들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비롯한 18세기의 음악적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고정된 사회적 구조이자 틀'이었던 궁정 사회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논의나, 모차르트의 죽음을 '사회적 실존의 좌절' 즉, '사회적 죽음'으로 본 것이 흥미롭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여겨져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나중에 죽음을 앞두고서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자신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어 '스스로를 포기'하다시피 죽어 간 모차르트의 생애는 그 자체로 매우 드라마틱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차르트의 생애를 한 개인의 드라마로 내버려두지 않고 한 편의 '사회학적 드라마'로 서술한 것이 엘리아스의 [모차르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어나 설명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긴 하지만, 분량이 짧은 편이어서 찬찬히 읽다 보면 비교적 부담없이 사회학적 논의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기분이 내킨다면, 모차르트를 틀어놓고 읽어나가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http://youtu.be/rfeoBc4fD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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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나누리 옮김 / 필맥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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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자신을 문제로 삼으라"고 멋지게 말했듯이 자신에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대답을 구하는 인간은 자신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통찰하기 위해 자기 인생의 길을 마치 지도처럼 펼쳐 보게 된다. 그는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때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 갈림길은 어느 자서전에서나 볼 수 있다. 인생의 묘사인가 체험의 묘사인가, 타인을 위한 예증인가 자신을 위한 예증인가, 객관적이고 외적인 자서전인가 주관적이고 내적인 자서전인가, 즉 단순한 사실의 전달인가 자신에 대한 보고인가로 길이 나뉘는 것이다. 앞의 길이 언제나 대중을 향하는 경향을 띠고 교회나 책에서 볼 수 있는 고해처럼 상투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한다면, 뒤의 길은 독백하듯이 생각하는 것이어서 대부분 일기의 형식만으로 충분하다. 괴테, 스탕달, 톨스토이와 같이 정말로 복합적인 성격의 사람들만이 이 두 길의 완전한 통합을 시도했고, 그 결과로 자신을 영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아성찰은 그저 준비단계일 뿐이지 깊이 숙고하는 단계는 아직 아니다. 모든 사실은 그 자체로 그대로 있으면 진실로 유지되기가 쉽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할 때 비로소 예술가의 진짜 고난과 고통이 시작되고, 정직성이라는 영웅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형제애를 발휘해 인간의 일회성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본능적 충동이 우리를 몰아붙이지만, 그만큼이나 반대의 충동, 즉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에 대해 침묵하려는 의지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보호와 침묵의 의지는 수치심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 인간의 수치심이 지닌 근본적인 비밀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가장 잔인한 모습과 불쾌한 모습을 노출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읽는 사람이 조롱하는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 가장 빠져들기 쉬운 위험한 유혹인 것이다.

 

- 슈테판 츠바이크,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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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깊이 읽기를 염두에 두고, 그러니까 '톨스토이' 때문에 읽기 시작했지만, [서문]이 오히려 인상 깊은 책입니다.


'톨스토이'에 관한 글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빛과 어둠의 두 초상>(자연사랑, 2001)에도 똑같이 실려 있습니다. 다만 번역은 다릅니다. 문단 구분도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카사노바...>는 본래 저자인 츠바이크가 카사노바-스탕탈-톨스토이로 이어지는 정신적, 예술적 발전 단계를 상정하고 쓴 책이기 때문에 필맥 출판사본을 읽는 게 합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소 인위적 발췌 편집이긴 하지만) ['톨스토이' vs '도스토예프스키' = '빛' vs '어둠']의 구도 역시 무척 땡기는 구도이긴 합니다. 러시아 문학에서 둘이 차지하는 비중을 봐도 그렇고, 둘의 라이벌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원래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평전critical biography) 작가로 무척 유명하죠. 그런데 그 많은 평전들을 그저 무턱대고 써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체계를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이 점이 다른 평전 작가와 그를 구분하는 점일 것입니다.

 

가령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는 [세계의 거장들/대가들(Baumeister der Welt)] 시리즈의 세 번째 권에 속합니다. 원제는 번역하면 '삶의 세 시인' 정도가 되겠네요. 하지만 국내 번역본에서는 이 제목을 빼고, 대신 '츠바이크가 본'이란 구절을 집어 넣었습니다. 국내에서 츠바이크에 대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굳이 이렇게 제목을 변형시킬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하긴 뭐 '삶의 세 시인'이란 제목 역시 구매욕구를 상승시킬 만한 제목은 아닙니다만.......

 

 

참고로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사노바...> [서문] 첫머리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권 <마신(데몬)과의 싸움(Der Kampf mit dem Damon)> :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

- 마성적인 힘에 쫓겨 자신과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무한의 세계로 들어선 유형


2권 <세 명의 거장들(Drei Meister)> :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 현존하는 현실 곁에 소설이라는 우주를 만들어 제2의 현실을 구축, 즉 '서사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한 사람'의 유형


3권 <삶의 세 시인(Drei Dichter ihres Lebens)> :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 (대우주를 있는 그대로 그리기 보다) 자아의 소우주를 세계 속에 펼쳐나간 유형. '주관주의적 예술가' '자서전'이라는 예술 형식은 어떤 것인가를 탐색.  

 

1권에서 다루는 인물들이 걸어간 길이 '무한 세계'로 이어진다면, 2권에서의 길은 '현실 세계'로 이어집니다. 3권에서의 길은 '자기 자신'에게도 이어지게 됩니다. 어쨌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츠바이크는 3이라는 숫자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뤄지는 작가들의 면면이 화려한 가운데, 1권이 특히 끌립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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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1 : 재능있는 리플리 리플리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그책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리플리 시리즈의 전체가 드디어 번역 출간 되는군요. 1권부터 5권까지 다 출간된 것은 아니고 우선 1-3권만 나왔습니다.

1권 <재능 있는 리플리> 2권 <지하의 리플리> 3권 <리플리의 게임>까지가 일단 나온 것이죠.

<리플리를 쫓는 소년> <리플리 언더 워터>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4권과 5권은 내년에 출간 예정이라고 합니다.

출간 기념 이벤트도 하네요.

 

 

 

 

 

 

시리즈의 첫편인 <재능 있는 리플리(The Talented Mr. Repley)>(1955)는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동서문화사(네. '바로 그' 출판사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에서 나온 <태양은 가득히>로만 읽을 수 있었죠.

 

 

그 한참 전에도 다른 출판사에서 <태양은 가득히>라는 같은 제목으로 출간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이 <태양은 가득히>라는 제목은 <리플리>를 원작으로 삼은 프랑스 영화(르네 클레망 감독, 1960)의 제목을 따른 것이지요.

영화의 주인공 알랭 들롱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한국에서 <리플리>는 일종의 '영화 소설'로 읽혀온 셈입니다.

 

 

1999년 앤소니 밍겔라 감독의 <재능 있는 리플리>가 개봉하면서 <리플리>는 원래의 제목을, 그리고 하이스미스라는 걸출한 작가의 소설이라는 원래의 자리를 되찾은 셈이지만, 영화의 인기에도 불구하고(크게 흥행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이 되지 않아 국내 추리소설 팬들(혹은 하이스미스 팬들)의 갈증은 해소되지 못했습니다.

 

 

민음사에서 하이스미스 단편선을 내놓으면서 가뭄에 단비 역할을 했습니다만, <리플리> 시리즈가 빠진 하이스미스는 앙꼬 없는 찐빵...

열혈 추리팬들로서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할 조건이 마련된 셈이었던 것... (뭐 저는 그정도 열혈 팬은 아니었습니다)

 

 

리플리 시리즈의 각 권 출간 년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재능 있는 리플리> 1955

<지하의 리플리> 1970

<리플리의 게임> 1974

<리플리를 쫓는 소년> 1980

<리플리 언더 워터> 1991

 

대략 40여 년에 걸쳐 집필된 시리즈인 셈입니다.

 

 

시리즈가 연속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각 권 마다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출간됐다는 사실,

특히 1편이 출간되고 15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2편이 출간된 것이 눈에 띄네요.

 

 

여기서 한 가지 추정해보게 되는 것은 애초에 하이스미스는 리플리를 시리즈물로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리플리라는 캐릭터의 인기와 매력이 워낙 높아 2편을 내게 된 것이 아닌가.

다른 작품들도 (4년, 6년, 11년이란 시간적 격차로 미루어 볼 때) 마찬가지 상황에서 쓰여진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작가가 캐릭터를 창조하고 장악한 게 아니라 그 반대인 셈입니다.

작가가 창조해낸 캐릭터가 그 인기와 매력을 무기로 작가를 장악하고 글쓰기를 계속하도록 추동한 경우랄까요.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그 자신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캐릭터를 창조하는 건 모든 작가들의 꿈일 겁니다.

 

그는 물건 갖기를 좋아했다. 많은 물건을 갖는 게 아니고, 자신이 가지고 싶어 했던 물건 중 오랜 시간에 걸쳐 고른 물건을 특히 좋아했다.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자존심이 길러진다. 문제는 겉모양이 아니고 품질이며, 그 품질을 소중히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자각되고, 존재한다는 것이 기쁨이 되었다. 다만 톰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뿐이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존재하고 있다. 세상에는 비록 돈이 있어도 자기가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들에게는 돈이 필요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종류는 알 수 없지만 보증이다.

(<태양은 가득히>, 동서문화사, 313-4)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 비교를 해보고 싶은 대목은 위의 대목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베스트 컷'으로 꼽은 대목이기도 하지요.

(에리히 프롬의 스테디 셀러) <소유냐, 존재냐>가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사실에 대한 자각, 즉 소유/소유에 대한 자각이 존재를 보증해준다는 것인데, 이만큼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의 존재방식을 잘 표현한 대목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비주체의 존재 방식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지도 않습니다. 소비(그리고 소비를 통해 얻게 되는 물건/사물)는 존재를 보증해줄 뿐더러 존재를 풍요롭게(기쁘게, 충만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물건을 고르는 것, 물건의 겉모양이 아니라 그 품질을 사랑하는 것은 자존심(자존감)을 길러준다는 것이지요. 무분별한 소비가 아니라 스마트한 소비, 감성이 스민 소비인 셈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소유와 존재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있는데, 사실 소유와 존재는 서로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위의 인용 대목은 말해줍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톰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톰의 욕망과 환상, 그리고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 '소비를 존재와 연결시킬 줄 모르는 사람'을 자신과 구분하는 톰의 이분법은 결국 범죄로 이어지고, 자기 기만과 정체성의 혼란/분열로 이어지니까요. 디키를 똑같이 흉내 내는 톰은 디키일까요 톰일까요.

 

 

톰은 타인으로 위장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 위장하려고 하는 인물의 분위기와 기질을 먼저 익히는 일과 그 분위기와 기질에 어울리는 얼굴 표정을 수반해 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밖의 일은 자연스럽게 그것에 맞추어 나가면 된다. (169)

 

 

톰은 고독감은 느꼈어도 쓸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 전 세계가 그의 청중이 되어 그를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 때문에 그는 무척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만에 하나라도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파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독특하고 순수한 분위기가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명배우가 무대에서 중요한 역을 연기할 때 갖는,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역은, 다른 누가 하더라도 이 이상 멋지게 연기할 수 없다'는 확신과 같았다. (175-6)

 

 

리플리는 마치 게임을 하듯,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듯 디키를 연기하고 거기에서 희열을 느낍니다. 그는 자신이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삶의 에너지와 자부심을 길어올립니다. 언제 들킬지 모르는 위험한 게임이기에 그의 스물네 시간은 언제나 긴장감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긴장감 자체가 에너지로 작용하며, 리플리에게 무한한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리플리는 두 개의 정체성을 능수능란하게 오가야 하며 각각의 정체성과 각각이 놓인 상황을 완벽히 통제해야 합니다. 그는 12역을 담당하는 배우이자 총감독이 되어야 합니다. 감독이 주연 배우를 맡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으로 미루어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리플리 본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상황이 리플리에 의해 연출된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즉 누구도 리플리의 의도를 알지 못하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마치 스탭과 조연배우들의 도움 없이 혼자 영화를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보면 리플리가 벌인 일은 단 한 사람의 연기력과 연출력으로 세계 전체와 맞서는 일, 세계 전체를 기만하는 일인 셈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의 운명에, 그리고 그 운명을 결정한 신에게 도전합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정확한 계산연기, 그리고 '상상'에 능한 리플리는 아슬아슬하게 이 모든 일을 해냅니다. 결국 그는 디키가 되는 데 성공하고, 그 연후에는 디키가 가진 것만 고스란히 빼먹고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합니다. 돈만 많고 쓸 줄 모르는 무분별한 소비자를 죽이고 돈만 빼앗아 (본인이 염원해마지 않았던) 스마트한 소비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후에 리플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점이 궁금했었는데, 이제 시리즈 전체가 출간이 되니 곧 그 궁금증을 풀 수 있겠지요. 일단은 1권과 2권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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