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구매욕을 자극하는 표지 디자인의 세계문학 작품 판본들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일단 독자들을 가장 열광케하리라 짐작되는 것은 플로베르의 대표작 <마담 보바리>입니다. 펭귄클래식에서 <보바리 부인>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네요. 포인트가 디자인인 만큼, 펭귄클래식을 비롯, 각 출판사가 펴내고 있는 세계문학 시리즈의 디자인 및 만듦새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뭐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건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밝히는 글이므로 그 점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그 동안 펭귄클래식은 일명 블랙 펭귄이라하여, 바탕은 검은색에 위쪽 면에 큰 그림이 들어가고 중간에서 약간 아래(3/4 지점)에 흰 띄가 가로지르는 표지 디자인을 고수했었죠. 그런데 이번에 <보바리 부인>을 내면서 펭귄북스의 오리지널 표지 디자인을 채택했습니다.

 

펭귄북스의 오리지널 디자인은 초창기 펭귄의 판매 전략과 관련이 있습니다. 펭귄은 표지 디자인에서 각 책의 성격을 드러내기보다 출판사를 드러내는 데 집중합니다. 수평으로 3분할--3단 그리드--해서 로고, 책 제목, 저자 이름만 넣었는데, 이 단순한 디자인은 당시 많은 책들이 화려한 일러스트와 장식으로 꽉 찬 표지를 내세운 것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이후 수요가 다양해지면서 펭귄의 디자인도 다양해집니다. 한국의 펭귄클래식이 채택한 디자인인 '펭귄 블랙 클래식'은 '고전(classic)' 작품들에 적용되는 디자인입니다. 이 '블랙 펭귄'은 책장에 꽂아두었을 때도 남다른 맛이 있습니다. 반면 민음사나 문학동네, 그리고 창비는 작품마다 다른 색깔을 입혔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떤 걸 더 선호하는지는 독자마다 다를 듯합니다.

 

한국에서 '블랙 펭귄'의 예외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입니다.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번역되는 제목인데, '시간'을 '시절'로 바꿨습니다.)

 

 

 

 

 

 

 

 

 

 

 

 

 

 

 

 

 

그 이전에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의 경우에는 '블랙 펭귄' 디자인 말고도 따로 양장본 표지 디자인을 선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작품을 다른 디자인과 제책으로 선보이는 것은 한국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고, 펭귄 UK나 펭귄 USA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펭귄북스의 디자인적 측면(표지 디자인, 로고, 제책 등)에 대해서는 <매거진 B>10호에서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잡지 자체가 디자인, 만듦새의 측면에서 꽤 훌륭한 잡지이기도 합니다. 디자인, 기능, 가격의 측면에서 '균형잡힌(balanced) 브랜드(brand)'를 매월 하나씩 다루는 월간지입니다.  

 

 

 

 

 

 

 

 

 

 

 

 

 

 

 

 

<매거진 B>가 소개하는 펭귄북스 소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1935년 영국에서 시작한 펭귄은 가격을 낮추고 휴대성을 높인 문고판 발행, 시대적 요구를 놓치지 않는 기획, 그리고 북디자인을 통한 브랜드 아이덴티티 확립 등 현대 출판사가 가야 할 길을 줄곧 제시해왔습니다. 펭귄은 값싼 책을 만들더라도 최고의 작가를 섭외하며 결코 내용까지 가벼운 책이 되지 않도록 노력 했습니다. 이는 '책은 읽는 것'이라는 단순한 신념을 지닌 창업자 앨런 레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펭귄하면 유명한 오리지날 디자인, 펭귄 로고와 수평 3단 그리드 표지디자인이 떠오릅니다. 책 표지 자체로 하나의 아이콘이 된 경우라 하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가벼운 페이퍼백, 문고본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페이퍼백이 대중화되는 데 큰 역할을 한 출판사가 펭귄입니다. 20세기 들어서 독서 인구가 늘고 또 여행 인구가 늘면서, '부담 없이 싼 가격에 구입해서 들고 다니며 읽기 좋은 책', 즉 접근성과 휴대성이 높은 책에 대한 수요가 생겼는데 그러한 흐름에 영리하게 편승했다 하겠습니다.

 

(* 펭귄하면 또 떠오르는 건 <채털리 부인의 연인>입니다. D. H. 로렌스의 이 작품은 로렌스의 모국인 영국에서 '외설물'로 간주되어 오랫동안 출판 금지였는데(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출간), 로렌스 사후 30년을 맞아 펭귄출판사에서 20만부를 찍습니다. 이에 검찰이 출판사를 기소하고 법정 공방 끝에 출판사가 승소합니다. 그리고 찍어 낸 20만부는 하루 만에 매진되었다고 합니다.)

 

 

 

 

 

 

 

 

 

 

 

 

 

 

 

 

 

 

 

 

 

-

한데 세계문학은 페이퍼백보다는 ('고전'으로서의 그 위상에 걸맞게) 장중한 하드커버가 제맛이라고 여기는 독자들도 상당수 있을 듯합니다. 8-90년대에 나온 세계문학 전집들은 하드커버인 경우가 많았죠. 책 외판원이 각 가정을 돌아다니며 세일즈(방문판매)를 하던 시절이었죠. 웬만한 집 책장에는 계몽사나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 전집이 꽂혀 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세계문학 전집은 인터넷 주문이나 홈쇼핑(!)을 통해 판매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페이퍼백(혹은 반양장)이네요.

 

세계문학 전집을 일관되게 하드커버로 내고 있는 출판사는 을유문화사와 열린책들 정도가 있습니다. 문학동네에서는 모든 작품을 양장과 반양장, 두 가지 종류로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장과 반양장의 차이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양장과 문고본, 이렇게 두 종류로 내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전집은 만듦새가 꽤 좋은 편입니다. 표지 디자인도 괜찮고, 본문 편집에도 일관성이 있습니다. 분량이 많은 책도 웬만해선 분책을 하지 않고 한 권으로 낸다는 것도 이 출판사의 특징입니다. 들고 다니기 무겁다는 단점이 있으나 1권만 갖고 다니면서 책을 다 읽어버린 경우, 2권을 읽다가 앞의 내용을 확인할 일이 생기는 경우에는 유용하다 하겠습니다.

 

 

 

 

 

 

 

 

 

 

 

 

 

 

 

 

 

 

 

 

 

 

 

 

 

 

 

 

 

 

 

다만 각주가 아니라 미주를 달고 있고, 이 미주가 일련번호로 표기되지 않고 별 갯수로 표기되어 있어서 다소 불편한 면이 있습니다. 뭔가 있을 것 같아 애써 찾아봤는데 별 내용이 없으면 독서 흐름이 끊기고 맥이 빠진달까요.

 

각주와 미주, 이것도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텐데요, 저는 각주를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빨리 눈만 움직여 확인을 할 수 있으니까요. 미주를 선호하는 분들은, 각주가 독서의 흐름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저자가 달아놓은 '원주'가 아니라 역자가 달아둔 '역주'의 경우에는, 뭐랄까요 '원문'에 일종의 '이물질'이 '끼어든' 것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시대적, 장소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거나 어떤 단어나 표현의 숨겨진 뜻, 그러한 표현을 쓴 저자의 의도를 알려주는 '역주'가 고맙게 여겨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무조건 배척할 수만은 없을 듯.  

 

열린책들 W 세계문학 시리즈는 싼 가격, 그리고 나름 신경을 많이 쓴 티가 역력한--열린책들 디자인팀의 노동강도가 짐작되는-- 표지 디자인이 인상적입니다. 하드커버이고 판형은 을유문화사 판형과 비슷합니다(어째서 하드커버들이 반양장본보다 더 판형이 작은 건지는 모를 일이네요). 한 가지 불만은 본문에 여백이 별로 없고 줄간격도 좁아 너무 빽빽해서 가독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것입니다(읽었던 줄을 다시 읽고 있는 경우가 많이 발생...). 예전에 열린책들에서 미스터 노(Mr. Know) 시리즈를 낸 적이 있는데, W 세계문학 시리즈는 제책과 디자인 레이아웃만 바꾸고 본문 편집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듯합니다. 미스터 노 시리즈는 가격이 싸고 가벼워서 부담없이 사서 읽기 좋았죠. (펭귄 북스의 원래 컨셉을 따라한 듯?) 하지만 이제는 모두 절판이 되어 '레어템'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스터 노 시리즈에 대해서도 불만이 하나 있었는데, 너무 가벼운 데다 판형도 작아서 책상 위에 두고 읽을 경우 책이 쉽게 닫혀버리는 게 불만이었습니다. 독서대에도 잘 고정이 되지 않아 읽을 때 반드시 손으로 잡고 읽어야 했죠... 덧붙여 종이가 다소 두껍고 마찰력이 적어서 (손에 땀이라도 쥐지 않으면)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도 불만이었습니다... (거 참, 불만도 되게 많네요. 하지만 펭귄클래식은 정말 종이가 손에 닿는 느낌부터가 다르다는...)

 

카프카 <소송>의 표지디자인, 판형 등을 출판사별로 비교해봐도 재밌습니다. 카프카 전집은 '솔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이 '솔 판본'은 하드커버에다 판형도 커서 묵직합니다. 그런가 하면 펭귄클래식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사진을 표지에 집어 넣었습니다... 표지 그림만 놓고 봤을 땐, 을유문화사가 가장 나은 듯하네요. 열린책들은 디자인팀에서 따로 제작한 표지를 썼습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송>과는 어울리지 않아...!). 표지에 사진이나 그림을 넣을 때는 해당 사진과 그림의 작가에게 (저작권이 살아 있는 경우) 저작권료를 따로 지불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비용 절감이 되려나 싶습니다(하지만 디자인팀은 잦은 야근을 하겠죠).

 

 

 

 

 

 

 

 

 

 

 

 

 

 

 

 

 

 

 

 

 

 

 

 

 

 

 

 

 

 

 

 

 

그나저나 <마담 보바리>는 워낙에 김화영 교수의 번역본(민음사)이 '정본'처럼 통용되고 있었는데, 새로운 디자인에 끌려서라도 펭귄클래식 번역본을 선택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은 저도 그 중의 한 명이 되었네요.

 

 

 

 

 

 

 

 

 

 

 

 

 

 

 

 

 

 

솔직히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의 표지는 마음에 드는 게 거의 없습니다. 좀 지나치게 세로로 긴 '타워' 판형--마치 아이폰 5를 연상시키는--도 개인적으론 불만입니다. 판형이 세로로 길다보니 책을 펴서 본문을 읽을 때도 위 아래 여백이 지나치게 넓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서 언급한 미스터 노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책이 잘 펼쳐지지 않는다는 것도 불만입니다. 책이란 게 내용이 중요하지 외양이 뭐가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번역 퀼리티 만큼이나 신경이 쓰이는 게 책의 만듦새이기도 합니다.

 

표지 디자인, 판형, 여백, 글씨체, 줄간격 등 본문 편집, 종이, 제본 상태, (손에 잡았을 때의 그립감을 결정짓는) 볼륨감, 표지의 질감 등등. 사실 이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책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가다 그런 책을 만났을 땐 무척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하드커버보다는 반양장이나 페이퍼백을 선호하는 편이고, 작은 판형의 문고본도 좋아합니다. 세계문학 문고본으로는 책세상 문고, 문지 스펙트럼 문고가 있습니다. 이런 문고본들은 여행 갈 때나 예비군 훈련 갈 때 아주 유용합니다. 실은 유용하고 말고를 떠나 문고본에 대한 무조건적 애정이랄까 하는 게 있어서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라도 문고본이 있으면 따로 사둡니다.

 

 

 

 

 

 

 

 

 

 

 

 

 

 

 

 

 

 

 

세계문학 시리즈 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선호하는 것은 펭귄클래식입니다. 심플한 표지 디자인이나 펼쳐놓고 읽기에 적당한 판형도 맘에 들지만, 좀 더 디테일하게는 표지나 본문 종이가 손에 닿을 때의 촉감도 좋습니다. '책이 손에 딱 잡히는' 느낌이 든달까요. 표지나 본문 종이가 너무 매끈거려서(빤딱거린다, 고도 하죠) 손끝에서부터 거부감이 드는 책들도 있거든요. 뭐 너무 민감하게 굴고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은 <뿔(웅진)>에서 나왔는데, 펭귄클래식코리아와 같은 계열(웅진씽크빅)이어서 그런지 만듦새가 펭귄클래식과 비슷합니다. 표지만 봐서는 물론 알 수 없지만, 책을 만져보면 비슷한 그 느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앨리스 먼로가 단편 작가여서 생각 났는데, 최근에 현대문학에서 눈길을 끄는 디자인의 세계문학 단편선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표지 디자인도 예쁘지만 '하드보일드 스쿨의 교장' 대실 해밋의 단편선이 들어있다는 점이 또 한 번 눈길을 끕니다. 데미언 러니언은 어디서 들어본 적이 없는 작가라 깜짝 놀라기도. 브로드웨이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기둥 줄거리가 된 단편을 쓴 작가라고 합니다. 출간 예정인 작가로는 모파상, 오 헨리 등 이미 일반에 널리 알려진 단편 작가들도 있지만, H. P. 러브크래프트, 허버트 조지 웰즈 등 이른바 '본격문학'판에서는 소외되었던 작가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단편하면 떠오르는 작가는 역시나 체홉인데요, 최근에 시공사에서 체홉 단편선이 새로 출간되기도 했지만, 현대문학 시리즈로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네요. 체홉 단편선도 어느 덧 이렇게나 많은 종이 출간됐네요. 아래의 책들은 수록된 작품들이 저마다 다릅니다. 표제작도 다들 다르죠. 나름 '대표' 단편선으로 기획해서 내놓은 것일 텐데, 각 출판사마다 '대표'가 다릅니다. 해서 체홉의 작품 세계를 일별하려는 독자라면 일일이 목차를 확인해가며 책을 구매하고 또 읽어야 한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체홉 정도의 작가라면 단편 '선집'이 아닌 '전집'이 나올 때도 됐는데 말입니다.

 

 

 

 

 

 

 

 

 

 

 

 

 

 

 

 

 

 

 

 

 

 

 

 

 

 

 

 

 

 

 

 

 

2000년대 후반들어 본격화된 세계문학 출판 붐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전반적인 불황 속에서도 여러 출판사들이 세계문학 쪽에 공을 들이고 있는 덕에 디자인과 만듦새 측면에서 훌륭한 책들을 접할 수 있는 건, 일단 독자로서는 큰 행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고생하는 편집자, 디자이너분들의 입장은 또 따로 들어봐야 할 듯합니다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평전critical biography) 작가로 무척 유명하죠. 그런데 그 많은 평전들을 그저 무턱대고 써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체계를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이 점이 다른 평전 작가와 그를 구분하는 점일 것입니다.

가령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는 [세계의 거장들/대가들(Baumeister der Welt)] 시리즈의 세 번째 권에 속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Drei Dichter ihres Lebens : Casanova, Stendhal, Tolstoi> 번역하면 '세 명의 자서전 작가'가 되겠네요. 하지만 국내 번역본에서는 이 제목을 빼고, 대신 <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서 츠바이크에 대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굳이 이렇게 제목을 변형시킬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하긴 <세 명의 자서전 작가>란 제목 역시 구매욕구를 상승시킬 만한 제목은 아닙니다......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의 원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사노바...> [서문] 첫머리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권 <마신(데몬)과의 싸움(Der Kampf mit dem Damon)> :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
- 마성적인 힘에 쫓겨(붙들려) 자신과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무한의 세계로 들어선 유형

2권 <세 명의 거장들(Drei Meister)> :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 현존하는 현실 곁에 소설이라는 우주를 만들어 제2의 현실을 구축한 유형, 즉 '서사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한 사람'의 유형

3권 <세 명의 자서전 작가(Drei Dichter ihres Lebens)> :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 (대우주를 있는 그대로 그리기 보다) 자아의 소우주를 세계 속에 펼쳐나간 유형. '주관주의적 예술가' '자서전'이라는 예술 형식은 어떤 것인가를 탐색.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는 <천재, 광기, 열정(1,2)>(세창미디어, 2009)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구성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어요.

1권 : 발자크, 디킨스, 스탕달, 카사노바
2권 :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클라이스트

순서가 뒤죽박죽이고, 횔덜린은 아예 빠져 있습니다. 또 츠바이크는 각 권 첫머리에 [서문]을 써두고 있는데, 이 [서문]들 역시 번역본에서는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츠바이크가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권의 책에 묶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요. 특히 도스토예프스키가 톨스토이와 묶이지 않고 얼핏 봐도 결이 무척 다른 발자크-디킨스와 함께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구성부터 다른 한국어 번역본을 읽어서는 이런 궁금증을 해소할 수가 없다는..... 아니 번역본만 접해서는 (원래 츠바이크의 구성을 알 수 없으니) 애초에 "어째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발자크-디킨스와 함께 다뤄진 거지?"하는 궁금증을 가질 수조차 없다는.....

이런 궁금증이야말로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크가 대표하는) 19세기 유럽 문학 전반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 어떤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천재, 광기, 열정>의 본문은 (간혹 등장하는 오표기들이 번역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무리 없이 읽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원래 구성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서문]들은 왜 다 빼버렸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수십 편의 츠바이크 평전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을 느낀 것이 이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인데, 한국어 번역본은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사랑은 없다
(진정한, 충분한)
우리는 기댈 데 없이 살아가고,
버려진 채 죽는다.
...
연민을 구하는 외침이
허공에 울려 퍼진다.
우리의 몸은 망가졌지만
우리의 살은 여전히 탐욕스럽다.

젊고 싱싱한 몸의
약속들은 사라지고,
우리는 노년으로 접어든다.
아무것도 우릴 기다리지 않는

사라진 우리의 나날에 대한
헛된 기억 외에는,
증오의 소스라침
그리고 적나라한 기억 외에는.

- 미셸 우엘벡, <어느 섬의 가능성>

섹스와 광고가 판치는 우리 사회는 욕망의 충족을 개인적인 영역에 묶어 두면서 욕망을 어마어마한 규모로 발전시키는 데 몰두하고 있어. 사회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경쟁이 지속되어야 하고, 경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욕망이 증가하고 확대되어야 하는 거지. 그 욕망이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어.

- 미셸 우엘벡, <소립자>

아감벤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사회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모든 사회계급이 용해되어 있는 단일한 행성적인 '소시민계급'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 소시민계급은 자신의 이해(권리)에 민감하지만 다른 이해를 가진 집단과의 차별화에도 민감하다. 그들은 기업이 저지르는 부정에 항의하기도 하지만, 기업이 제공하는 자본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극)에 깊이 도취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체제의 저항자라기보다는 수호자에 더 가깝다. [...] 정치가 소멸될 때, 그 뒤로 어른거리는 것은 '분노의 그림자'이며 도래하는 폭력에 대한 예감이다.

- 강경미, <'도래하는 폭력'에 대하여>, <<말과 활>> 2호.


*
언어가 지니는 현실규정력이 있다. 그냥 마음속에 할 말을 품고 있는 것과 그것을 입 밖에 내는 것, 문장으로 쓰는 것은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XX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라는 맹세를 입 밖에 내는 건 효과가 크다. 말에 마음이 구속된다고 할까, 그런 효과가 생긴다.

우엘벡 같은 경우는 대놓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세계는 지옥이다. 그런데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 지옥은 바로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니까.’ 굉장히 기분 나쁜 선언적 메시지다. 근데 이게 또 설득력이 있다. 작가로서 당대를 바라보는 통찰이 돋보인다고 할까.

물론 당대에 대한 통찰은 웬만한 작가라면 다 갖고 있는 것(이라고들 말해진다). 우엘벡의 특별한 점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통찰보다 단연 묘사가 앞선다. 무슨 얘기냐면, 다른 작가들의 경우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윤리적' 통찰을 앞세우느라 묘사가 희생되곤 하는 걸 자주 보게 된다. 묘사를 아낀다고 할까 아니면 겁낸다고 할까. 특히 감정 묘사, 심리 묘사에서 그런 느낌을 자주 받는다. 묘사된 현실은 지옥인데 작가(화자)는 자꾸 거기서 희망을 찾으려한다.

감정이나 심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건 사실 무척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포장을 한다. 귀에 괜찮게 들리는 표현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동시에 진부한) 표현들을 동원해서 말이다. 가령 ‘모모 작가가 모모 소설에서 제시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겉보기엔 파국적이지만) 인간이 사랑의 가능성을 끝까지 추구해야 함을 보여준다’ 라거나 ‘모모 작가의 모모 작품은 죽음과 광기에 맞서 (작가는 결국 미쳐서 죽었지만) 그가 끝까지 추구하려 했던 진실의 기록이다’와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일단 '사랑'이니 '진실'이니 '가능성'이니 하는 단어가 등장하면 독자는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작가 본인도 마찬가지고. 광고의 3요소, 3B(beauty, baby, beast)가 고객들에게 부담없이 어필하는 것과 비슷하다.

작가가 작품을 쓴다는 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드러내는 일이니 위험 부담이 매우 크고 또 때에 따라선 굉장히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당대 사회를 치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성실하게 묘사하는 것이 '우리는 지옥에 살고 있고, 그 지옥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우리 중 누구도 이 지옥만들기를 그만 둘 생각이 없으며, 또 그만둘 수도 없다.'라는 파국적 통찰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거기서 한 발짝 물러서는 건, 그렇게 물러섬으로써 명백한 결론 내기를 유보하는 건,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불가능한 희망을 위치시키려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엘벡은 그런 ‘한 발짝 물러섬’이 없다. '진격의 우엘벡'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과활 - 2호 - 2013 10-11월호
말과활 편집부 지음 / 일곱번째숲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지금까지 인간이 찍었던 모든 사진들 중, 그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후 수십 년이 지나서도 계속 유통되는 사진은 오직 이것 한 장뿐이다."

 

홍세화 씨가 발행인으로 있는 '종합 인문주의 정치 비평지'를 표방하는 <말과 활> 2호에서 무척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습니다. <체 게바라 사진의 기구하고 고달픈 오십 년>(김현호, 사진비평가)이란 제목의 글입니다.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먼산?) 체 게바라의 사진(혹은 그것의 팝 아트 버전 이미지)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라는 그의 말(로 간주되는 문구)과 더불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2000년에 실천문학사에서 낸 붉은색 표지의 <체 게바라 평전>은 체(Che)의 이미지와 저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베스트셀러가 됐고 큰 반향을 일으켰죠. 얼마 안 가 <혁명을 팝니다>와 같은 책들이 나와 혁명의 이상과 혁명가의 이미지를 제멋대로 전유하고 맥락 없이 소비하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체의 사진은 비단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인종과 국경과 종교를 초월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해보면 이렇습니다.

 

 

"이 사진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괴이하다. '게릴레로 에로이코'(체의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가 사진에 붙인 이름, '영웅 게릴라'란 뜻)는 엄청난 수의 티셔츠와 포스터로 제작된다. 전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체 게바라 티셔츠는 여전히 잘 팔린다. 동티모르의 이슬람 원리주의 게릴라들과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계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은 체 게베라 티셔츠를 입는다.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나 생전의 우고 차베스도 마찬가지였다.

 

얄궂게도 가자 지구 서안의 팔레스타인 인티파타들과 이스라엘 축구팀인 FC텔아비브 서포터들은 모두 게릴레로 에로이코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체 게바라의 얼굴은 디에고 마라도나의 어깨와 마이크 타이슨의 배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으며, 지젤 번천의 비키니 수영복과 엘리자베스 헐리의 루이비통 가방에도 있다. 심지어 독재자의 아들 알 사디 카다피는 체 게바라의 얼굴을 호화 요트의 양쪽 옆면에 크게 그려넣기까지 했다. 스노보드, 보드카 병, 팬티, 머그컵, 와인 라벨, 지포 라이터, 담뱃갑, 콘돔, 열쇠고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벨파스트와 베이루트, 베를린, 서울, 뉴욕, 리마, 홍콩, 네팔에 이르기까지 이 사진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든 곳에 살아서 움직인다."

 

가히 '혁명을 상업주의가 포획했다', '혁명이 패션으로 전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범인은 역시나 상업자본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글의 저자는 혁명과 혁명가를 찍은 수많은 사진 중 왜 이 사진만이 그렇게 포획당했는지, 오랫동안 살아남았는지를 묻습니다. 여기서부터 글이 재밌어집니다.

 

체의 사진을 찍은 사진가는 원래 패션사진가(지망생)이었다고 합니다. 알베르토 코르다라는 이름인데요. 그는 정식 사진 교육을 받지 않았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생일잔치나 세례식, 결혼식장을 돌아다니며 허락 없이 사진을 찍은 뒤 현상한 것을 들고 가서 흥정해파는 일로 생겨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코르다는 아바나 구시가지에 '메트로폴리나타'란 이름의 스튜디오를 여는데, 여기서 그는 쿠바의 젊고 예쁜 여성들을 모델로 미국 잡지에 실리는 것 같은 '패션사진'들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가 롤모델로 삼은 인물은 당대 최고의 패션사진가로 꼽힌 뉴욕의 리처드 아베든이었다고 해요. 코르다는 혁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거죠. 그보다는 패셔너블한 사진을 찍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의 쿠바에는 패셔너블한 모델도 별로 없었고, 패셔너블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코르다는 쿠바 혁명의 주역들인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만나게 되고 이들의 사진을 찍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실제로 젊고 잘생긴, 그리고 멋진 미소를 지닌 청년들"이었죠. 체 게바라의 사진-이미지가 레닌이나 마오쩌둥, 호치민의 사진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외모가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혁명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체 게바라의 나이는 불과 31세, 피델 카스트로의 나이는 33세였습니다. 코르다는 이 젊고 잘생긴 혁명가들의 사진을 "마치 패션쇼의 뒤편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셀러브리티들처럼 화사하게" 찍었습니다. 체 게바라의 사진이 하나의 패션 아이콘이 되고 패션 상품으로 무차별하게 소비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맥락이 있었던 것입니다. 혁명이 패션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 혁명은 처음부터 패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였던 셈입니다.

 

 

*

<DOMINO>에 이어 또 하나의 '자극적인' 잡지가 나온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uanpark 2013-12-13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작가 쟌 모리스가 체 게바라와 얽힌 두 가지 에피소드를 엮어 얘기했던 대목이 문득 떠오르네요...
체 티셔츠를 입고서도, 해맑은 표정으로 "근데 체 게바라가 누구에요?"라고 물었던 어느 젊은 히치하이커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지던 그 이야기.....ㅋ
시로군님 덕분에, 얼른 찾아서, 서재에 올리기로~^^&
 

과학 소설의 대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 황금가지에서 '완전판'으로 곧 나온다고 합니다. 왕년의 아시모프 팬들은 공중제비를 세 바퀴 넘을 소식.

 

저는 이 책을 중학생일 때 탐독... 하려다가 결국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그땐 분권이 되어 있어서 총 9권인가 그랬는데, 4권까진가 읽고 접었더랬죠. 지금 돌이켜보자니, <파운데이션> 완독 실패가 본격 과학소설 매니아가 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었던 듯. 아시모프의 또 다른 시리즈인 <로봇>은 몇 번씩 반복해가며 읽었는데.

 

<로봇...>에 비해 <파운데이션>은... 뭔가 어려웠어요. 대하소설과 같은 긴 책을 잘 읽지 못하는 성향이기도 하고. (이건 지금도 그래서 <안나 카레니나>는 읽지만, <레 미제라블>은 읽지 못 한다는...)

 

결국 ('본격'이란 수식어를 붙이기엔 좀 모자란) 베르베르의 <개미>로 갈아탔고, 한참 후에 (역시 '본격'이라기엔 모자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은 게 제 SF 독서경험의 8할이랄까... 어디가서 명함도 못 내밀 SF 독서력입니다. 하지만 <로봇> 시리즈는 무척 재밌게 읽어서, 고등학생일 때도 읽고, 대학생이 된 이후로도 몇 번 더 읽었어요. 특히 <로봇> 시리즈의 1권부터 4권까지는 '압권'이라 할만치 재밌습니다. (5-6권은 나중에--<파운데이션>을 쓰고난 이후 시점에--써서 그런지 좀 허황된 구석이 있습니다...)


 

그나저나 예전에 두 시리즈를 출간한 '현대정보문화사'라는 출판사는 어떻게 된 거지? 찾아보니 번역자가 같군요. 예전 번역본을 출판사만 옮겨 재출간한 것이네요. 덕분에 표지나 제책은 상당히 좋아진 것 같은데, 어쩌면 그맛에 완독할 수 있을지도...

 

 

 

 

 

 

 

 

 

 

 

 

 

 

 

 

 

 

 

 

 

 

 

 

 

 

 

 

위의 <로봇>은 2001년에 재출간된 판본이고, 제가 중학생일 때 읽은 것은 아래의 판본입니다.

 

아래 판본은 1992년에 출간된 것이라 당연히 지금은 절판되었습니다만, 표지 이미지가 있네요. 추억 돋게 시리.

 

 

 

 

 

 

 

 

 

 

 

 

 

 

 

 

 

시리즈 물은 일단 분량이 많아 읽는 게 부담이 되긴 합니다만, 이게 내 취향에 딱 들어맞아 재밌을 경우엔 무한한 즐거움과 만족감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특정 작가의 '전작'을 읽을 때도 동일한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낄 수가 있죠. 하지만 한국에서 그걸 만끽하기란 참 어려운 일.

 

최근 에밀 졸라와 슈테판 츠바이크에 꽂혔는데 이들의 '전작'을 읽을 날이 과연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밀 졸라는 20권에 달한다는 '루공-마카르 총서'를 썼는데 이게 절반도 채 번역이 안 되어 있고,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가 쓴 평전들이 제법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편집의 일관성이 없습니다. 이건 뭐 에밀 졸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책은 내용도 중요하고, (번역서일 경우) 번역자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출판사-편집자의 역량일 텐데, 여기서 일관성을 기대할 수 없으니 '전집' 또는 '전작'을 읽는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열린책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나 '폴 오스터' 전집, '움베르트 에코' 전집, 책세상의 '카뮈' '릴케' 전집, 솔 출판사의 '카프카 전집' 등이 그나마 한 출판사가 한 작가를 '책임진' 경우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전집 발간' 시도는 요즘 들어선 통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다. 출판계의 전반적 불황 때문이기도 하겠고, 출판 정책에 대한 전국민적 무관심, 인터넷 서점의 출판 시장 패권 장악으로 인한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의 일반화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일반 독자 입장에서야 "어쨌든 싸게 좋은 책 읽을 수 있으면 장땡" 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전작' 읽기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기회도 현저히 줄어들겠죠. 독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텐데 여기에 관심 있는 정책입안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게 현실...

 

위기감이 공유되고, 여론이 형성된다면야 정책입안자도 신경을 안 쓸 수 없겠지만, 아직까지 그런 기미는 안 보이는 듯합니다. 출판이든 독서 문화든 전적으로 시장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잘 나가는 책만 더 잘 나가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현암사에서는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만. http://blog.aladin.co.kr/705623165/6595053

 

그리고 민음사에서는 밀란 쿤데라 전집을 냈군요... 쿤데라는 물론 훌륭한 작가지만, 지금껏 워낙에 민음사 작가로 자리매김 된 감이 있어서(+팔리기도 많이 팔려서) '우려먹기'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만. 황금가지도 민음사 계열이니 '우려먹기'는 이 쪽의 종특인 것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으로 바꿔서 자사 세계문학 전집 목록에 올려놓는 등, 민음사는 글 잘쓰고 잘 팔리는 작가 '우려먹기'에 일가견이 있는 듯. 뭐 좋은 책도 많이 내는 출판사이긴 하지만, 책 가격의 7-80%에 해당하는 신간적립금을 마구 투척하는 등 출판생태계를 교란하는 데도 앞장서는 곳이어서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전집 출간 시도가 전무한 건 아닙니다. <파운데이션> '완전판' 출간 소식과 같이 전집 출간 소식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편입니다. 다만 전집 출간이 이뤄지는 경우 대다수가 장르문학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점.

 

최근의 시도 중에서는 필립 K. 딕(폴라북스), 대실 해밋(황금가지) 전집 출간이 인상적이었고, 마쓰모토 세이초(북스피어+모비딕)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도 황금가지에서 얼마 전에 (드디어!) 전집이 완간되었죠.

 

 

 

 

 

 

 

 

 

 

 

 

 

 

 

 

 

 

 

나오다 중단된 상태이긴 합니다만, 시공사의 '귀족 탐정 피터 윔지 시리즈'도 있네요. 피터 윔지는 '추리소설 황금기'에 활약한 영국 추리 작가 도로시 세이어스의 주인공입니다. 홈스, 포와로, 브라운 신부에 밀려 지명도가 한참 낮습니다만, 앞서 언급된 세 탐정이 지겨운 분들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될 듯. 하지만 3권까지 나오다 중단된 상태고, '시공사'에서 이 시리즈를 더 낼 수 있을까는 의문...

 

 

 

 

 

 

 

 

 

 

 

 

 

 

 

 

 

 

 

더불어 '피니스아프리카에'라는 (이름도 어려운) 출판사에서는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내고 있습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게 평범한 경찰들--87분서 소속 경찰들--이란 점에서 본격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경찰 소설(?)이라 부를 수 있을 텐데, 저는 얼마 전 <킹의 몸값>을 무척 재밌게 읽었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이 책을 읽고 영화 <천국과 지옥>을 만들었다죠. 구로사와의 필모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저로서는 <킹의 몸값>이란 경찰소설과 구로사와 감독이 잘 연결이 안 돼서 이걸 어떻게 영화화했나 궁금해서 영화도 확인해 봤습니다. 놀랍게도 그냥 모티브만 따온 게 아니라 (전반부는) <킹의 몸값>의 설정과 줄거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더라는.

 

구로사와 감독이 영화화까지 할 정도니 좋은 소설, 이라고 하면 '권위에의 호소'라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겠지만, 뭐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읽은 순수한(?) 독자인 제가 재미(+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어떤 의미까지)를 보증합니다...(보증이 안 되려나...;;)

 

 

 

 

 

 

 

 

 

 

 

 

 

 

 

 

 

 

 

이렇게 나름대로 활발하다고 할 수 있는 장르문학 쪽의 전집 출간 상황과는 달리, 순문학 쪽은 요즘 주요 출판사들이 모두 뛰어들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세계문학 전집] 때문에, 한 작가의 '전작' 출간이 오히려 어려워진 상황이 된 듯합니다. 작가의 대표작이 [세계문학 전집] 목록에 1권, 잘하면 2권 출간되는 식이고, 그나마 중복 출판이 많아 독자로서는 번역본 선택에 나름 공을 들여야 하는 상황.

 

장르문학에서만 전집 출간 시도가 간헐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장르문학은 (순문학보다는) '재미' 있다"는 고정관념 덕에, 혹은 높은 충성도를 보이고 때로는 전도사를 자처하기도는 '한 줌의 열성팬'들 덕에 손익분기점을 넘길 정도의 판매량은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양자 간의 균형이 좀 맞춰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시장성'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선 안 되지 않을까요? 각 출판사에서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세계문학 전집] 덕에 세계문학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건 사실입니다만, 그와 더불어 한 작가의 '전작'을 내는 시도가 지금보다는 좀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독자 입장에서야 가장 잘 쓴 '대표작' 한 권 읽는 게 경제적이긴 하겠습니다만, 그러다 보니 어떤 작가의 '졸작'과 '태작', '잊혀진 작품', '거의 흑역사에 해당하는 작품'을 읽는 재미는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세계문학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작가일지라도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기 마련인데, 이걸 확인하는 재미와 의미가 쏠쏠하죠. 작가가 어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표작만 봐서는 이런 건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처음부터 '완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완전판 전집'을 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 작가의 작품 세계 전체를 조망한다는 건, 다른 어떤 (무식한) 인내심 돋는 독서 경험 보다 값진, 이를테면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다 읽는" 삽질스런 독서 경험하고는 비할 수 없는 독서 경험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해당 작가의 전작을 담은 '전집'이 나오지 않는 한, 어떤 계기로든 '전집' 출간 붐이 일지 않는 한, 이런 값진 경험은 언제까지나 전공자들의 전유물로 남을 수밖에 없을 듯.(전공자들이 실제로 '전작'을 읽는지는 논외로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