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구매욕을 자극하는 표지 디자인의 세계문학 작품 판본들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일단 독자들을 가장 열광케하리라 짐작되는 것은 플로베르의 대표작 <마담 보바리>입니다. 펭귄클래식에서 <보바리 부인>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네요. 포인트가 디자인인 만큼, 펭귄클래식을 비롯, 각 출판사가 펴내고 있는 세계문학 시리즈의 디자인 및 만듦새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뭐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건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밝히는 글이므로 그 점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그 동안 펭귄클래식은 일명 블랙 펭귄이라하여, 바탕은 검은색에 위쪽 면에 큰 그림이 들어가고 중간에서 약간 아래(3/4 지점)에 흰 띄가 가로지르는 표지 디자인을 고수했었죠. 그런데 이번에 <보바리 부인>을 내면서 펭귄북스의 오리지널 표지 디자인을 채택했습니다.
펭귄북스의 오리지널 디자인은 초창기 펭귄의 판매 전략과 관련이 있습니다. 펭귄은 표지 디자인에서 각 책의 성격을 드러내기보다 출판사를 드러내는 데 집중합니다. 수평으로 3분할--3단 그리드--해서 로고, 책 제목, 저자 이름만 넣었는데, 이 단순한 디자인은 당시 많은 책들이 화려한 일러스트와 장식으로 꽉 찬 표지를 내세운 것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이후 수요가 다양해지면서 펭귄의 디자인도 다양해집니다. 한국의 펭귄클래식이 채택한 디자인인 '펭귄 블랙 클래식'은 '고전(classic)' 작품들에 적용되는 디자인입니다. 이 '블랙 펭귄'은 책장에 꽂아두었을 때도 남다른 맛이 있습니다. 반면 민음사나 문학동네, 그리고 창비는 작품마다 다른 색깔을 입혔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떤 걸 더 선호하는지는 독자마다 다를 듯합니다.
한국에서 '블랙 펭귄'의 예외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입니다.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번역되는 제목인데, '시간'을 '시절'로 바꿨습니다.)
그 이전에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의 경우에는 '블랙 펭귄' 디자인 말고도 따로 양장본 표지 디자인을 선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작품을 다른 디자인과 제책으로 선보이는 것은 한국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고, 펭귄 UK나 펭귄 USA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펭귄북스의 디자인적 측면(표지 디자인, 로고, 제책 등)에 대해서는 <매거진 B>10호에서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잡지 자체가 디자인, 만듦새의 측면에서 꽤 훌륭한 잡지이기도 합니다. 디자인, 기능, 가격의 측면에서 '균형잡힌(balanced) 브랜드(brand)'를 매월 하나씩 다루는 월간지입니다.
<매거진 B>가 소개하는 펭귄북스 소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1935년 영국에서 시작한 펭귄은 가격을 낮추고 휴대성을 높인 문고판 발행, 시대적 요구를 놓치지 않는 기획, 그리고 북디자인을 통한 브랜드 아이덴티티 확립 등 현대 출판사가 가야 할 길을 줄곧 제시해왔습니다. 펭귄은 값싼 책을 만들더라도 최고의 작가를 섭외하며 결코 내용까지 가벼운 책이 되지 않도록 노력 했습니다. 이는 '책은 읽는 것'이라는 단순한 신념을 지닌 창업자 앨런 레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펭귄하면 유명한 오리지날 디자인, 펭귄 로고와 수평 3단 그리드 표지디자인이 떠오릅니다. 책 표지 자체로 하나의 아이콘이 된 경우라 하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가벼운 페이퍼백, 문고본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페이퍼백이 대중화되는 데 큰 역할을 한 출판사가 펭귄입니다. 20세기 들어서 독서 인구가 늘고 또 여행 인구가 늘면서, '부담 없이 싼 가격에 구입해서 들고 다니며 읽기 좋은 책', 즉 접근성과 휴대성이 높은 책에 대한 수요가 생겼는데 그러한 흐름에 영리하게 편승했다 하겠습니다.
(* 펭귄하면 또 떠오르는 건 <채털리 부인의 연인>입니다. D. H. 로렌스의 이 작품은 로렌스의 모국인 영국에서 '외설물'로 간주되어 오랫동안 출판 금지였는데(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출간), 로렌스 사후 30년을 맞아 펭귄출판사에서 20만부를 찍습니다. 이에 검찰이 출판사를 기소하고 법정 공방 끝에 출판사가 승소합니다. 그리고 찍어 낸 20만부는 하루 만에 매진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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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세계문학은 페이퍼백보다는 ('고전'으로서의 그 위상에 걸맞게) 장중한 하드커버가 제맛이라고 여기는 독자들도 상당수 있을 듯합니다. 8-90년대에 나온 세계문학 전집들은 하드커버인 경우가 많았죠. 책 외판원이 각 가정을 돌아다니며 세일즈(방문판매)를 하던 시절이었죠. 웬만한 집 책장에는 계몽사나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 전집이 꽂혀 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세계문학 전집은 인터넷 주문이나 홈쇼핑(!)을 통해 판매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페이퍼백(혹은 반양장)이네요.
세계문학 전집을 일관되게 하드커버로 내고 있는 출판사는 을유문화사와 열린책들 정도가 있습니다. 문학동네에서는 모든 작품을 양장과 반양장, 두 가지 종류로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장과 반양장의 차이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양장과 문고본, 이렇게 두 종류로 내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전집은 만듦새가 꽤 좋은 편입니다. 표지 디자인도 괜찮고, 본문 편집에도 일관성이 있습니다. 분량이 많은 책도 웬만해선 분책을 하지 않고 한 권으로 낸다는 것도 이 출판사의 특징입니다. 들고 다니기 무겁다는 단점이 있으나 1권만 갖고 다니면서 책을 다 읽어버린 경우, 2권을 읽다가 앞의 내용을 확인할 일이 생기는 경우에는 유용하다 하겠습니다.


다만 각주가 아니라 미주를 달고 있고, 이 미주가 일련번호로 표기되지 않고 별 갯수로 표기되어 있어서 다소 불편한 면이 있습니다. 뭔가 있을 것 같아 애써 찾아봤는데 별 내용이 없으면 독서 흐름이 끊기고 맥이 빠진달까요.
각주와 미주, 이것도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텐데요, 저는 각주를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빨리 눈만 움직여 확인을 할 수 있으니까요. 미주를 선호하는 분들은, 각주가 독서의 흐름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저자가 달아놓은 '원주'가 아니라 역자가 달아둔 '역주'의 경우에는, 뭐랄까요 '원문'에 일종의 '이물질'이 '끼어든' 것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시대적, 장소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거나 어떤 단어나 표현의 숨겨진 뜻, 그러한 표현을 쓴 저자의 의도를 알려주는 '역주'가 고맙게 여겨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무조건 배척할 수만은 없을 듯.
열린책들 W 세계문학 시리즈는 싼 가격, 그리고 나름 신경을 많이 쓴 티가 역력한--열린책들 디자인팀의 노동강도가 짐작되는-- 표지 디자인이 인상적입니다. 하드커버이고 판형은 을유문화사 판형과 비슷합니다(어째서 하드커버들이 반양장본보다 더 판형이 작은 건지는 모를 일이네요). 한 가지 불만은 본문에 여백이 별로 없고 줄간격도 좁아 너무 빽빽해서 가독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것입니다(읽었던 줄을 다시 읽고 있는 경우가 많이 발생...). 예전에 열린책들에서 미스터 노(Mr. Know) 시리즈를 낸 적이 있는데, W 세계문학 시리즈는 제책과 디자인 레이아웃만 바꾸고 본문 편집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듯합니다. 미스터 노 시리즈는 가격이 싸고 가벼워서 부담없이 사서 읽기 좋았죠. (펭귄 북스의 원래 컨셉을 따라한 듯?) 하지만 이제는 모두 절판이 되어 '레어템'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스터 노 시리즈에 대해서도 불만이 하나 있었는데, 너무 가벼운 데다 판형도 작아서 책상 위에 두고 읽을 경우 책이 쉽게 닫혀버리는 게 불만이었습니다. 독서대에도 잘 고정이 되지 않아 읽을 때 반드시 손으로 잡고 읽어야 했죠... 덧붙여 종이가 다소 두껍고 마찰력이 적어서 (손에 땀이라도 쥐지 않으면)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도 불만이었습니다... (거 참, 불만도 되게 많네요. 하지만 펭귄클래식은 정말 종이가 손에 닿는 느낌부터가 다르다는...)
카프카 <소송>의 표지디자인, 판형 등을 출판사별로 비교해봐도 재밌습니다. 카프카 전집은 '솔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이 '솔 판본'은 하드커버에다 판형도 커서 묵직합니다. 그런가 하면 펭귄클래식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사진을 표지에 집어 넣었습니다... 표지 그림만 놓고 봤을 땐, 을유문화사가 가장 나은 듯하네요. 열린책들은 디자인팀에서 따로 제작한 표지를 썼습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송>과는 어울리지 않아...!). 표지에 사진이나 그림을 넣을 때는 해당 사진과 그림의 작가에게 (저작권이 살아 있는 경우) 저작권료를 따로 지불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비용 절감이 되려나 싶습니다(하지만 디자인팀은 잦은 야근을 하겠죠).

그나저나 <마담 보바리>는 워낙에 김화영 교수의 번역본(민음사)이 '정본'처럼 통용되고 있었는데, 새로운 디자인에 끌려서라도 펭귄클래식 번역본을 선택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은 저도 그 중의 한 명이 되었네요.

솔직히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의 표지는 마음에 드는 게 거의 없습니다. 좀 지나치게 세로로 긴 '타워' 판형--마치 아이폰 5를 연상시키는--도 개인적으론 불만입니다. 판형이 세로로 길다보니 책을 펴서 본문을 읽을 때도 위 아래 여백이 지나치게 넓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서 언급한 미스터 노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책이 잘 펼쳐지지 않는다는 것도 불만입니다. 책이란 게 내용이 중요하지 외양이 뭐가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번역 퀼리티 만큼이나 신경이 쓰이는 게 책의 만듦새이기도 합니다.
표지 디자인, 판형, 여백, 글씨체, 줄간격 등 본문 편집, 종이, 제본 상태, (손에 잡았을 때의 그립감을 결정짓는) 볼륨감, 표지의 질감 등등. 사실 이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책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가다 그런 책을 만났을 땐 무척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하드커버보다는 반양장이나 페이퍼백을 선호하는 편이고, 작은 판형의 문고본도 좋아합니다. 세계문학 문고본으로는 책세상 문고, 문지 스펙트럼 문고가 있습니다. 이런 문고본들은 여행 갈 때나 예비군 훈련 갈 때 아주 유용합니다. 실은 유용하고 말고를 떠나 문고본에 대한 무조건적 애정이랄까 하는 게 있어서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라도 문고본이 있으면 따로 사둡니다.


세계문학 시리즈 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선호하는 것은 펭귄클래식입니다. 심플한 표지 디자인이나 펼쳐놓고 읽기에 적당한 판형도 맘에 들지만, 좀 더 디테일하게는 표지나 본문 종이가 손에 닿을 때의 촉감도 좋습니다. '책이 손에 딱 잡히는' 느낌이 든달까요. 표지나 본문 종이가 너무 매끈거려서(빤딱거린다, 고도 하죠) 손끝에서부터 거부감이 드는 책들도 있거든요. 뭐 너무 민감하게 굴고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은 <뿔(웅진)>에서 나왔는데, 펭귄클래식코리아와 같은 계열(웅진씽크빅)이어서 그런지 만듦새가 펭귄클래식과 비슷합니다. 표지만 봐서는 물론 알 수 없지만, 책을 만져보면 비슷한 그 느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앨리스 먼로가 단편 작가여서 생각 났는데, 최근에 현대문학에서 눈길을 끄는 디자인의 세계문학 단편선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표지 디자인도 예쁘지만 '하드보일드 스쿨의 교장' 대실 해밋의 단편선이 들어있다는 점이 또 한 번 눈길을 끕니다. 데미언 러니언은 어디서 들어본 적이 없는 작가라 깜짝 놀라기도. 브로드웨이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기둥 줄거리가 된 단편을 쓴 작가라고 합니다. 출간 예정인 작가로는 모파상, 오 헨리 등 이미 일반에 널리 알려진 단편 작가들도 있지만, H. P. 러브크래프트, 허버트 조지 웰즈 등 이른바 '본격문학'판에서는 소외되었던 작가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단편하면 떠오르는 작가는 역시나 체홉인데요, 최근에 시공사에서 체홉 단편선이 새로 출간되기도 했지만, 현대문학 시리즈로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네요. 체홉 단편선도 어느 덧 이렇게나 많은 종이 출간됐네요. 아래의 책들은 수록된 작품들이 저마다 다릅니다. 표제작도 다들 다르죠. 나름 '대표' 단편선으로 기획해서 내놓은 것일 텐데, 각 출판사마다 '대표'가 다릅니다. 해서 체홉의 작품 세계를 일별하려는 독자라면 일일이 목차를 확인해가며 책을 구매하고 또 읽어야 한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체홉 정도의 작가라면 단편 '선집'이 아닌 '전집'이 나올 때도 됐는데 말입니다.





2000년대 후반들어 본격화된 세계문학 출판 붐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전반적인 불황 속에서도 여러 출판사들이 세계문학 쪽에 공을 들이고 있는 덕에 디자인과 만듦새 측면에서 훌륭한 책들을 접할 수 있는 건, 일단 독자로서는 큰 행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고생하는 편집자, 디자이너분들의 입장은 또 따로 들어봐야 할 듯합니다만...)